"4·19로 이어진 민족 민주운동의 불씨를 지핀 2·28 민주의거에 대해서 모두들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 내심 섭섭했습니다. 한 세대를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2·28을 새로운 대구정신으로 승화시키자는 운동이 되살아 나고 있어서 기쁩니다"
25일 동대구호텔에서 열린 '2·28 민주의거 40주년 기념 국제 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수만리를 멀다 않고 호주에서 날아온 신구자(58·시드니·한호그룹 장정웅 회장 부인)씨. 갈래머리 여고 2년생으로 1960년 경북여고 32회 학생회장이자 대대장이던 신씨는 그 후 '운동권 부부'로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말못할 고생을 겪다가 고향을 떠난지 21년만에 다시 찾은 2·28의 현장에서 목이 멨다.
"정부에서 하는 각종 행사에 강제적으로 동원돼 손을 흔들고 박수를 쳐야하고…. 모두들 학생을 정치 도구로 이용하는게 너무 싫었어요" 이런 신씨에게 '이승만 생일 기념 웅변대회'에 나가라는 명령 아닌 명령이 떨어졌다. 선생님들은 "이번 한번만 나가다오"라고 애원했고, 학생들의 정치적 동원은 되풀이됐다. 그러다 2·28의 실마리가 된 '일요 등교령'이 떨어졌다.
"등교령이 내린 그 일요일, 동기생 모두 강당에 모여있다가 '학생을 정치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구호와 함께 수성천변으로 달려가다가 저는 남부서에 연행됐지요" 그날 이후, '운동권의 대모'로 낙인 찍혀 신씨의 젊음은 핍박으로 얼룩졌다. "네가 신구자냐"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고, 취직도 어려웠다.
결혼도 경북대생으로 4·19 주역이던 운동권 남편과 했다. 각종 외압은 더욱 가중됐다. 둘째 자녀를 낳기까지 '색깔론'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 모든 고생을 겪으며서도 '2·28의 자유정신' 하나를 붙잡고 정도를 걸었다고 했다. 그 결과 사업은 번창했고 지금은 '열손가락 안에 드는 해외 교포'로 발돋움했다.
"'한국 민주화'라는 크나큰 물줄기의 발원이 된 2·28만 생각하면 머나먼 이국에서 조차 자다가도 벌떡 일어납니다" 40주년을 맞은 2·28의 자유 정신이 재점화되는 현장을 지켜보는 신씨는 "이제야 잃어버린 고향과 시간을 되찾았다"면서, 그 숭고한 정신이 청사에 길이 빛나고, 대구시민이 세계 속에 우뚝 설 수 있게 되기를 기원했다.
崔美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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