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일본서 꽃핀 우리 도자기문화-3)

추적 추적 내리는 봄비 속에 아침부터 이삼평의 실체를 찾아나선다. 조선 도공 이삼평이 처음 발견했다는 이즈미야마는 아리타 시가지 동쪽 끝 도로변에 있다. 옆 산의 절개지 아래, 원형경기장을 닮은 평원 둘레에는 도석을 채취한 후 뚫린 동굴이 군데군데 입을 벌리고 있다.

5천여평은 됨직한 백색 평원을 보자 '얼마나 많은 도석을 실어냈으면'하는 상상에 그저 아득해질 뿐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즈미야마는 더 이상 도석광산이 아니다.

명치유신 즈음부터 철이 많이 섞인 질낮은 도석들이 나와 폐광되어 지난날 영광만 머금고 있다.

이즈미야마에서 아리타 시내쪽으로 돌아나와 아카에 마치(赤繪町)로 가면 제법 우뚝한 렌게이시야마(蓮花石山)줄기가 가로막는다. 다소 가파른 산기슭을 돌아들면 조선 도공 이삼평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도산신사(陶山神社)를 만날 수 있다. 도산신사는 1658년 8월 11일 이삼평 사후 그의 공을 기려 건립한 신사로 여느 신사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이삼평을 신으로 모시고 있다.

도산신사 입구의 높이 3.65m, 가로 3.9m 도리이(居鳥)는 1888년에 백자에 당초문양을 새겨넣어 세웠는데 일본 유일의 도자기 도리이로 유명하다.

또 신사를 지키는 백구(白狗), 참례자들이 손을 씻는 물항아리, 심지어 현판까지도 도자기로 만들어져 있어 과연 도자기 신을 모신 곳 다웠다. 도산신사의 산꼭대기에는 이삼평의 도조비가 아리타 시내를 굽어보며 서 있는데 비문에는 '공은 우리 아리타의 도자기 조상으로서 우리 도자업계의 큰 은인이다. 현재 도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은혜를 입고 있고 그 업적을 우러러 빈다'고 적고 있다. "아리타 도공들 가운데는 가마불을 지피는 날 새벽에 여기 도조비에 참배를 하는 도공도 더러 있죠. 그런만큼 이곳에서 이삼평은 주민을 수호하는 신과 같은 존재죠"안내를 맡아 준 사키야마(岐山)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도조비를 뒤로 하고 내려오는 길 발아래 펼쳐진 아리타는 비안개에 젖어 더없이 평화로워 보인다.

眼底家如櫛窯煙起脚間松風自萬高李祖鎭陶山

눈아래 집들은 줄지어 늘어섰고/가마에서 이는 연기 발아래 자욱하네/솔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푸르르고/아리타 도조 이삼평 도산을 지키시네.

중턱쯤 내려선 곳에 자리한 오석에 새겨진 비문이 그 옛날 아리타의 번영을 상상케 하기에 충분하다.

이제껏 아리타에서 찾아 헤맸던 것들이 '신(神) 이삼평'이었다면 이제 '인간 이삼평'을 만나야 한다.

13대 이삼평을 만나러 가는 길에 초대 이삼평 묘비에 우선 참배하기로 했다. 1960년대까지 땅속에 반쯤 깨진 채 묻혀 있었다는 비석은 돌이끼가 두텁게 앉았지만 그의 법명인 '월창정심(月窓靜心)'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묘비 앞에는 생화가 봄비에 젖어 처연한 모습으로 고개 떨어뜨리고 있다. 돌아오지 못할 이국땅 구천에서 떠돌 영령 앞에 합장하면서 소주 한잔 준비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묘지 한 블록 건너에는 초대 이삼평이 가마를 앉혔다는 덴구다니 가마터다. "여기는 발로 땅바닥을 툭툭 차기만 해도 온통 사기조각이에요. 덴구다니 가마가 어용요(御用窯)였으니 잘된 작품만 골라 나베시마 다이묘에 헌상하고 모조리 여기 깨어버렸으니 그 양이 얼마겠어요"안내인의 설명을 들으며 사기조각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릇 모양이 조선의 접시, 호리병과는 달리 날렵한 형태를 띤다. 그러나 나비, 운학, 용 등 새겨진 문양들에서는 아직 조선의 색채들이 언뜻 언뜻 비친다.

조선의 기술이 일본화 되어가는 증거들이란 생각에 문양이 뚜렷이 드러나는 사금파리 서너개를 주워 손수건에 싸고 13대 이삼평집으로 방향을 잡는다.

승용차도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골목길을 몇구비 꺾어 조그만 대문 앞에 섰다. 인기척을 내자 머리 바로 위 대문간 컨테이너 박스문이 열리고 노인분이 엉거추춤 계단을 내려선다.

아리타의 도자기 신으로 받들어지는 이삼평의 후손이 오늘 이렇게 궁색한 모습을 보여야하는가 하는 생각에 서글픔이 울컥 밀려 올라온다.

대학 갓 졸업한 도예 입문가의 공방보다도 더 옹색스런 작업장에서 400년 전통을 되살려 보려는 노인의 고단함에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노인은 무엇이 그리 미안스러운지 작업도구들을 분주하게 치우고 작업에 열중이던 그의 아들, 14대 이삼평은 연신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어색해한다.

하긴 작업장은 일행 네사람이 들어서도 앉을 자리도 마땅찮으니….

작업장 구석 철제 앵글 선반에는 13대 이삼평과 그의 아들이 정성스레 빚어놓은 백자들이 옹송거리듯 놓여있다.

유백색(乳白色) 백자들은 석고의 질감과도 같이 푸석 푸석한 눈맛을 준다.

더구나 문양이 새겨지지 않은 무지백자는 물기가 닿으면 금방이라도 풀어질 것 같아 보인다. 이것은 일본 백자의 특징이기도 하거니와 한계이기도 하다. 이제야 알 듯 하다.

왜 '소메쯔케'라는 청화 문양 위에 적색, 금색까지 덧칠되는 '가키에몬' 양식과 '이로 나베시마'라는 양식으로 발전해 갔는지를.

우리 백자는 만들어진 곳에 따라 각각의 색감과 감흥을 주는데 비해 천편일률적인 느낌, 일견 가벼워 보이는 무색 무미의 맛, 이것이 바로 일본 백자였구나.

때문에 일본 백자는 문양에 승부를 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 문양 청화 위에 다시 적색, 금색이 더해지고 시문(施文)기법 역시 붓에서 '후끼'까지 발전했을 테고….

안방으로 자리를 옮겨 차가 나오길래 13대 이삼평의 인생역정을 슬쩍 들춰봤다. "도자기 가문의 대를 잇는 것은 운명적이었을테니 일찍부터 도자기 일을 했겠네요"

"일찍부터 한 셈이지요. 윗대까지는 가세가 기울어 남의 집살이나마 도자기 일을 했어요. 나도 열다섯 되던 해부터 도자기 잡일을 배웠죠. 그러나 당시 일본은 전쟁중이었고 남자는 군대 가야 하던 시절이라 군에 가서 7년을 보냈어요"

말문이 트인 노인은 두 눈을 지긋이 감고 지난날들을 실타래처럼 풀어낸다.

"군에 제대하면서 가계를 이을 각오였지만 당시 일본 사회는 도자기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높지않아 남의 집 살이로 도자기 일을 한다는 것은 밥벌이로 신통찮았어요. 할 수 없이 내 가마를 하나 박겠다는 생각에 돈벌이로 나선 것이 철도일인데 그 일에 매달려 평생을 보낸 셈이 되어 버렸어요"

"생활이 어려워 가마를 놓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만 가마는 언제 놓았는지요"

"가마 놓은 지는 좀 되었어요. 올해 내 나이 80인데 정년퇴임하면서 어쨌든 가업은 이어야겠다는 생각에 퇴직금으로 0.3루베짜리 조그만 가마 하나 박았어요. 나야 늦게 시작했으니 작품도 미숙하여 아리타의 유명 도예인에 비하면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도조 이삼평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고 아들만은 가문을 일으켜 세워야한다는 생각에 조형대학을 보냈습니다. 지금은 아들이 우리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리라는 기대뿐이죠"

이야기를 하는 동안 아들의 눈을 슬쩍 비키며 회한에 젖은 노인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얘긴 즉 아들의 나이가 올해 서른아홉인데 아직 집안형편이 어려워 장가를 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리타 도자기의 원조 집안이면서도 오늘날 이렇게 쪼들리는 살림 때문에 애태우는 부자(父子)를 보고 있자니 목구멍에 뜨거운 무엇이 걸린 듯 착잡함에 더 이상 앉았기가 거북스러웠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나오는 길에 대문간에서 몇번이고 머리를 숙이며 비를 맞고 망연히 서있는 노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만약 이삼평 가문을 일으키는데 한국인들이 힘을 모아준다면, 일본에서 잊혀져 가는 역사를 환기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삼평후원회라도 만들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그것은 일본이 우리를 인정하고 우리가 일본에 대해 확인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할테니까.

-全忠瑨기자 cjjeon@imaeil.com

---14대 이삼평 쇼헤이 가네가에

-문양을 쓰지않는 무지백자를 주로 하는 것 같은데….

▲내가 관심을 두고 하는 작업은 물레를 이용하여 만드는 백자인데 기형연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무지백자를 할 건가.

▲앞으로 가능하다면 백자에 소메쯔케(染付, 코발트로 문양을 낸 청화의 일종)를 넣은 작품을 해보고 싶다. 초대 이삼평이 만들었던 백자로서 근본적인 틀은 지키되 마음이 손끝으로 전해져 인간의 감정이 깃든 작품을 해보고 싶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하고 있는 백자 스타일을 말하는 건가.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대학에서 도자조형을 전공했는데 그때 배운 것은 깔끔하고 정갈한, 그야말로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그런 그릇을 배우고 집착해왔다. 그러나 그런 그릇에서는 인간미를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정확한 도자기 보다는 자연스러우며 수더분한 그릇을 만들고 싶다.

-문양이 걸림돌이 될 것 같은데….

▲솔직히 문양은 자신이 없다. 그래서 앞으로 아내를 맞는다면 그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둘이서 완성시켜 하나의 작품세계를 펼쳐 보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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