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河) 일병! 사령부에 적정을 보고하고 귀대하라" 칠곡 가산산성 일대에서 수색작전을 펴던 1사단 수색중대장 최희섭 중위는 무선교신이 되지않자 하일병(경주문화중 4학년 재학중 지원입대)에게 연락업무를 맡겼다. 17세의 소년병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첩첩산중, 방향조차 분간할 수없는 칠흙같은 밤중에 동명에 있는 사단사령부까지 혼자 갔다 오라니… 무섭기도 하고, 그렇다고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고… 하일병은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제서야 어린 병사임을 알아차린 중대장은 동료 한명을 같이 보냈다. 가산전투가 막바지로 치닫던 8월 하순의 일이다.
당시 하일병과 동행했던 안봉근(安奉根·67·군위농업중 2학년 재학중 14세에 지원입대) 6·25 참전 소년지원병전우회 사무총장. 그는 "당시 지휘관이나 고참병들은 소년병을 "꼬마"라고 부르기도 했다"며 "어린 병사들로 인해 전장에 희비가 엇갈리는 일이 많았다"고 회고한다.
소년병(少年兵). 6·25 참전 노병들은 학도병 중에서도 병역의무가 없었던 14~17세의 지원병을 "소년병"으로 부른다. 말리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며 전선으로 달려갔던 소년지원병들. 전투훈련은 커녕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채 노도같이 밀려오는 인민군과 맞서 싸우다 못다핀 꽃송이로 쓰러져간 홍안(紅顔)의 넋들.
달빛 처연한 전선에서 때로는 고향땅 어머니 생각에 눈물짓고, 처음 사살한 인민군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밤새 잠 못이루던 그들은 꿈많던 사춘기 학생이었다. 그러나 소년병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애환은 세월 속에 묻혀 버린지 오래.
"흘린피 거름되어 초목만 무성하고/ 님잃은 아픈 마음 의지할 곳 어디메뇨/ 일점 혈육 어디갔뇨 세월만 한탄할까/ 목숨바쳐 지킨나라 뉘 있어 알아주리" 손가락을 깨물며 나이를 속인채 지원입대했던 6사단 공병대 소년병 김완식(향년 67세).
6·25 50주년을 20여일 앞둔 지난 2일 그는 동료 소년병이 지은 이 싯귀절을 곱씹으며 옛 전우들 곁으로 떠났다. 그의 생전 소망은 오로지 하나. 역사와 국민이 "소년병"을 기억해 주는 것이었다.
육군본부 직할 수색대원으로 참전했던 소년병 박태승(朴泰承·67·경산 자인중 휴학중 지원입대)씨. 그는 아직도 가슴 한구석에 지울수 없는 멍에가 남아있다. 평북 박천까지 북진했다가 후퇴하던 늦가을 무렵이었다.
"동료 한명과 앞서간 부대행렬을 허겁지겁 뒤쫓아가고 있었지요. 갑자기 뒤에서 날아온 총탄에 옆에 있던 전우가 등을 맞고 쓰러졌어요" 소년병은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적병은 바짝 뒤쫓고 있었고, 혼자서 부상당한 전우를 매고 갈수도 없는 상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있던 차에 신음하던 전우는 피범벅이 된 가슴을 확인하고는 "제발 죽이고 떠나라"며 애원을 했다.
박씨는 전우의 머리를 향해 M1 소총을 겨눌 수밖에 없었다. 그 소년병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고향이 경북 청도라는 것 뿐··. 해마다 6월이면 가슴 속에 덧나는 회한 때문에 박씨는 집안에 작은 법당을 만들고 소년병의 위패를 세웠다. 불공을 드린지 올해로 20년째.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수가 없다.
소년병들의 애환이 서린 가산산성(架山山城)은 같은 대구출신 학생들이 서로 총부리를 겨눈 비극의 현장이기도 했다. 8월 20일경 1사단에 배속된 8사단 10연대 3대대(대대장 김순기 대위·육사5기·대령예편)가 성안의 인민군과 일진일퇴의 접근전을 벌일 무렵.
미군 전투기와 야전포병의 집중포화에 성안의 인민군 병사들은 밤송이 떨어지듯 성벽 밖으로 곤두박질했다. 그때 10중대 3소대장 최창주 소위가 3명의 적병을 사로잡았다. 그들을 심문한 결과 놀랍게도 모두 대구출신이었다.
피난을 못온채 서울에 머물다 "대구가 해방됐으니 치안유지에 협력하라"는 북한당국에 의해 의용군으로 입대한 학생들이었다. 꿈에도 그리던 집과 가족들을 코앞에 두고 학생들은 단장(斷腸)의 고통 속에 죽어갔거나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가산전투는 27일 산성일대 무명고지에서의 처절한 교전을 정점으로 한동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국군 10연대 1대대와 인민군 14연대 2개 대대 병력간의 생사를 건 이날 혈투로 피아간 수백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국군 4중대의 경우 180여명의 병력 중 몸이 성한 사람은 장교 1명과 병사 10여명에 불과했다. 인민군도 포화에 일그러진 산등성이에 300여구의 주검을 남긴채 철수했다. 삼천리 강산이 온통 미쳐 버렸던 그해 여름, 호국의 영산 팔공산도 외국의 군대까지 가세한 형제간의 뼈저린 싸움에 소리없이 울었다.-趙珦來기자 swordjo@imaeil.com
--밀려든 피란민-대구 인구 70만 넘어
☆낙동강 전선하의 대구
전쟁전 30만명이던 대구의 인구는 8월 낙동강 방어선 형성과 함께 밀려든 피난민들로 70만명을 넘어섰다. 피난민들은 금호강이나 신천변 또는 철로변에 홑이불로 천막을 치고 고달픈 피난살이를 했다. 부모 잃은 아이들의 울음소리, 부황 든 환자들의 신음소리… 피난촌의 풍경도 비참했다.
8월 20일경에는 가산을 따라 금호강변 까지 침투한 인민군 유격대가 대구시내를 향해 박격포를 발사, 대구역 부근에 다섯발의 포탄이 떨어졌다. 시민들은 인민군의 대구 점령이 임박한 것으로 알고 피난길을 서두르는 등 한때 공황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인민군의 9월 공세로 다부동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6일 새벽 영천이 함락되자 국방부와 육군본부 산하 후방부대가 부산으로 철수했다. 다급한 전황으로 불안한 민심은 크게 술렁거렸다.
미8군은 내무부까지 부산으로 철수토록 요청했다. 그러나 일선 장병들의 사기와 민심의 극단적인 이반을 우려한 조병옥 당시 내무장관은 경찰병력과 함께 대구에 남기로 했다. 아무튼 대구는 수도 서울의 재판이 되는 운명은 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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