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모 직물회사의 부도는 섬유인들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얘기중 하나다. 연간 100억원이 넘는 매출도 매출이지만 무엇보다 40년간 섬유 한 우물만 파온 뚝심이 무너진 게 더 가슴을 아프게한다는 얘기다.
올들어 섬유경기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이 회사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자금난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금융기관에 지고 있는 부채는 80억원. 서문시장 근처 최고 노른자위에 140억원을 호가하는 4층 건물을 갖고 있어 그 정도는 하루 걱정거리도 되지 않았다, 지난 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런 회사가 생산품목을 바꿔보려고 직기부터 판 게 화근이었다. 공장 문이 닫히고 매출은 전혀 없다시피한 상황에서 막아야할 어음은 계속 돌아왔다. 공장을 세워놓으니 어렵다는 소문이 퍼져 결제어음은 피가 마르도록 밀어닥쳤다. 거래은행에선 '부실우려' 기업이라며 자금지원을 거절했다. 믿었던 부동산 처분도 벽에 부딪혔다. IMF 이전 140억원을 주고 사겠다던 모 금융기관은 흥정으로 80억원까지 내려왔지만 고개를 저었다.
수십년 기업을 해온 결과가 이래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에 회사대표의 사재까지 20여억원을 갖다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이 회사는 결국 6월말 부도가 났다.
기업이 쓰러지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만 201개 기업이 부도처리됐다. 6월 어음부도율은 1년 반만에 기록적인 1.0%로 치솟았다.
대구 상공업계의 명목상 수장인 채병하 회장의 기업도 쓰러졌다. 2천400억원을 들여 지은 원사 공장이 120억원을 막지 못했다. 더 설명이 필요 없는 대표 건설업체인 우방은 73억원이 없어 세 차례나 1차부도를 내 한여름 지역사회를 얼어붙게 했다.
실물경제만 힘을 잃은 것은 아니다. 금융부문은 아예 황폐해졌다고 할 정도로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 서울에는 홍수철 한강처럼 돈이 넘쳐나고 있는데 대구는 사막에 내던져진 것 처럼 유례없는 돈 가뭄에 타들어가고 있다.
3일 지역 국회의원 및 금융인들이 모인 가운데 열린 금융현안 간담회.
"영남종금 영업정지 이후 심리적 불안이 만연하면서 신용경색이 신용공황으로 번질 기미마저 적잖습니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대구.경북지회 최창득 지회장은 기업 연쇄도산의 현실화를 두려워했다.
"서민금융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해온 금고가 외환위기 이후 여수신 실적에서 50%이상 줄어들면서 존폐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송정섭 상호신용금고연합회 대구지구 의장은 금고, 신협, 새마을금고 등의 몰락을 심각하게 걱정했다.
벌써 중대형 금융기관의 집중 퇴출을 경험한 게 이 지역이다. 외환위기 이후 대동은행, 대구.경일종금, 대구.대동리스 등이 퇴출됐고 동양투신, 조선생명은 삼성, 현대그룹에 흡수됐다.
지난 5월 영남종금의 영업정지 사태는 그러나 둔감해질 대로 둔감한 지역에서도 충격이었다.
"550만 인구가 모여 사는 대구.경북에 리스사, 보험사 하나 없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기형구조가 아닙니다. 이제 그나마 하나 남았던 종금사마저 명맥이 끊길 지경에 놓이게 됐다는 것은 정말 한심한 상황입니다" 한국은행 대구지점 김시환 기획조사과장은 핏줄에 대동맥만 있다고 피가 잘 도는 것은 아니듯이 다양한 금융기관이 저마다 역할을 다할 때 금융이 건강한데 지역금융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금융 구조조정이 이같은 불균형을 오히려 심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불안한 금융기관 장래 때문에 정부가 운영하는 우체국에 돈이 몰리고 있지만 체신예금 대부분은 지역에서 돌지 않고 역외로 흘러나가고 있다. 주식투자 등으로 빠져나간 돈은 98.99년 2년간 2조원에 이른다. 반면에 지역의 상장.등록 법인은 전체의 1.9%에 불과하다. 지역의 돈이 지역기업이 아닌 서울기업을 배불리는 데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지역에 본사를 둔 유일 지방은행도 안심할 처지는 못된다.
금융 구조조정이 현안으로 떠오른 지난 봄 이후 대구은행은 은행합병이란 소용돌이에 휘말릴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일반은행 중 99년 당기순익 6위, 올해 상반기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12%로 최고수준 등 각종 지표로는 합병을 걱정할 형편이 아니지만 힘없는 지방은행으로선 한시도 안심할 수 없다.
"정부가 구조조정 얘기만 강요하지 않으면 정말 지역에서 오순도순 잘 할 수 있을 텐데" 대구은행 한 직원은 푸념했다.
중앙정부는 그렇다 치더라도 지방정부의 지역금융 무시는 제 발목 잡기 식이다. 경북대 최용호 교수는 지방정부가 지역에서 조성된 공공자금 대부분을 전국형 금융기관에 예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균희 시카고한인회장은 "미국의 주정부는 지방세수를 철저히 지방은행에 예치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금융 위축은 지역경제 위축으로 직결된다. 변변한 지역 금융기관 하나 없이 금융불모지로 전락한다면 지역 기업은 자금형편을 하소연할 곳조차 도무지 없는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대구.경북은 지금,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의 회오리속에서 이런 불행한 길을 중앙으로부터 강요당하고 있다. 李相勳기자 azzz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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