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길 나의 삶-기업인 명창 박수관씨

민요명창 박수관(朴水觀·45)을 만난 곳은 가야금소리 은은한 '국악원'이 아니었다. 대구시 서구 상리동 고속도로 부근 산기슭에 자리한 정밀기계 제조업체 '갑우정밀'의 고충상담실. 냉방기가 없어 후텁지근한 방안에서 '명창'은 결재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전국에서 이름난 민요경연대회의 최우수상을 휩쓸고 미국 카네기홀 연주경력까지 지닌 이색 소리꾼 박수관. 그는 종업원 50여명이 일하고 있는 이 공장의 사장이다.

"종업원들의 고충을 들어주는 사람이 경영자 아닙니까. 우리 회사엔 사장실이 없어요" 공장 사장 소리꾼의 마흔다섯해 인생만큼이나 별난 인사말이다.

'기계 만지는 일'보다 '소리'를 먼저 시작했다는 그의 '소리경력'은 여느 직업 소리꾼 이상으로 화려하다.

그는 지난 해 열렸던 '상주전국민요경창대회' '남도민요 전국명창대회' '서울전통공연예술경연대회' 등 전국 3대 민속예술대회의 최고상을 독식했다. 한 해 전국규모 국악경연대회 3개를 석권한 것은 찾아보기 힘든 사례.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글링카 국립음악원 명예음악박사 및 명예교수, 육군3사관학교 민요 객원교수를 맡고 있는 등 국악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국내에서는 물론, 외국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지난 달 30일엔 웬만한 연주자는 꿈에서나 상상해보는 미국 뉴욕 카네기 메인홀에서 독주회를 가져 3천여 청중들의 격찬을 받았다.

"국내에선 '우리 소리'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죠. 하지만 저의 경우 미국, 러시아, 일본 등지에서도 공연을 가져봤지만 외국인들의 반응은 국내와는 완전 딴판이에요"

박수관은 7살때 소리를 시작했다. 그 해 고향(경남 김해)마을에서 벌어졌던 놀이판에서 장구를 치며 버선발을 살짝살짝 들던 여인의 모습에 그만 혼을 뺏겼다.

"어린 나이에도 환장하겠더라구요. 어떻게 '저런 자태'에 '저런 소리'를 낼 수 있을까…"

'우리 소리'가 너무 좋아 닥치는대로 배웠다. 동네 어른들의 소리는 물론, 각설이 타령을 익히러 거지떼도 쫓아다녔다. '뉘집 아들 미쳤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제가 태어나자마자 만석꾼이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죽도 먹기 힘든 가난이 집안을 휘감았죠. 그런 상황에서 어린 아들놈이 '돈 안되는' 소리에 빠져들었으니 홀로 되신 어머니의 속은 그저 시커멓게 타들어가셨을밖에요"

박수관은 자신의 소리세계에 빛을 던져 준 스승 '김노인'에 대해 많이 얘기했다. 부산서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던 그 해. 부산진역앞에서 민요를 읊으며 지나가다 거지 행색의 한 노인을 만났다.

"그 분으로부터 약 3년동안 수십곡도 넘는 부전민요(不傳民謠)를 배웠어요. 제 소리를 만들게된 결정적 계기가 됐죠. '자연에 가깝게 불러라' '목이 아닌 가슴으로 불러라' 2가지 가르침을 제 가슴에 심어주셨어요"

그는 청소년시절을 소리로 채웠지만 미래를 소리에만 내맡기진 않았다. 손재주가 뛰어난 재능을 살려 공고에 진학했던 것.

'소리'를 왜 전공으로 삼지 않았냐고 묻자 그는 다른 비유 하나를 들었다. 자신은 전국사생대회에서 1등을 했을만큼 미술실력도 뛰어났지만 당시엔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은 '극장 간판쟁이'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최고 기술자가 되기 위해 하루 3시간으로 잠을 줄이면서 자격증 취득에 매달렸습니다. 과로와 영양실조로 졸도한 적도 여러번이었어요. 하지만 그토록 어려울 때 '소리'는 고단한 삶을 지탱케하는 유일한 영양분이었습니다"

방위산업체 10년 근무를 마치고 그는 지난 83년 대구시내 한 가정집 지하의 5평짜리 공간에서 정밀기계 제조업체를 차렸다. 돈이 모자라 여기저기서 사업자금을 빌렸다. 당시 그가 가진 것은 '하면된다'는 자신감 하나 뿐.

"저는 지금 나이 일흔이 된 사람보다 더 긴 세월을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공장이 본 궤도에 오를 때까지 3시간 이상 자 본 적이 거의 없으니까요. 32년 기술경력을 가진 일본인을 만났을 때 말했지요. 난 17년의 경력밖에 없지만 실제로는 34년이라고요. 남들이 쉬는 시간인 밤이 저에겐 낮이었으니 경력을 2배로 부풀린건 당연했죠"

창업 17년만에 5평 공장이 8천여평으로 늘었고 무역의 날 석탑산업훈장과 대구시 중소기업대상 수상 등 '수출하는 알짜 중소기업'으로 고속성장한 회사가 그의 자신감을 증명해준다.

"저는 기업체를 경영하지만 소리연습을 하루 10시간 정도는 꼭 합니다. 걸으면서도, 결재하면서도 '자자자자 자지자, 드더드더 드더더…'"

혹시 실수할 때는 없느냐고 묻자 그는 당연하다는듯 털어놓았다. "한 쪽 발엔 고무신, 다른 발엔 구두를 신고 다니질 않나, 중요한 모임에 작업신발 신고 나가 결례를 저지르고…. 사연이 많아요"

천진스럽게 웃으며 실수담을 털어놓는 박수관. 공학박사(한양대)이자 중소기업 사장, 국내 최고 수준의 명창자리까지 차지한 '완벽한 남자'에게도 허점(?)은 존재했다.

"어릴적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아직도 '돈 안되는 소리를 왜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이 말을 꼭 해주죠. '의식이 깬 상태에서 살아보지 못한 사람은 의식이 깬 상태에서의 삶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지 상상하지 못한다'고"

소리를 통해 사업을 깨우치고 인생에서까지 깨달음을 얻었다는 박수관. 그가 일하는 공장에서는 왱왱대는 기계 소음 대신 이 땅에 오랜 세월 뿌리박혀온 '우리 소리'가 더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崔敬喆기자 koala@imaeil.com,사진 李埰根기자

---박수관의 부전민요

소리꾼 박수관은 '부전(不傳)민요'의 대가다. '부전민요'란 글자 그대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떠돌다 끊어져 더이상 전해지지 않는 민요.

그는 당대 민초들의 진솔한 삶이 녹아 있는 부전민요에 관심을 기울여 약 500여곡이 넘는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됐다. 부전민요 연구는 사실상 빈약하기 짝이 없어 이름 난 명창들도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박수관은 '부전민요'를 알리기 위해 수차례 논문을 발표했고 러시아, 일본, 미국 등지까지 달려가 외국인들앞에서 우리 소리를 전했다. 지난 달 30일 미국의 심장 뉴욕 카네기 메인홀에서 열린 박수관의 무대. '영남 들노래'와 '한오백년'이 울려 퍼지자 미국인들은 칭찬을 마다 않았고 덕분에 현지 언론의 인터뷰 요구에 시달려야 했다.

박수관은 음역이 매우 넓다. 그가 '메나리제(상여가 나갈 때 곡하는 소리처럼 구슬픈 음색을 중심으로 한 음)'로 부르는 소리는 한서린 노랫말을 전하는 데 더할 나위 없다. 노랫말에 따라 발성을 달리하는 등 변화무쌍한 음색이 '박수관표 소리'의 특색.

그는 내년 3월 서울 국립국악원 발표회에 이어 가을쯤엔 대구서도 공연을 가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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