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특집-일월산(8)-'상신촌'과 주변 산촌

봉화쪽 일월산 산촌을 찾기 위해 재산면 장터를 거쳤다.

재산장터에서 좁게 난 콘크리트길을 따라 일월산 쪽으로 30분을 가다 상신촌 마을을 만났다. 재산면 동면리에 속한 곳이다. 아직도 20여호나 살고 있어 일월의 여타 산촌처럼 을씨년스럽지는 않다.

길 옆 능선주변으로 화전터 치고는 꽤 넓은 수박밭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사람들이 품앗이를 하고 있었다. 노인네며 아낙, 아이들이 모두 나와 수박 순치기에 여념이 없다.

수확이 안겨다 줄 기쁨을 미리 떠올리고 있는지 하나같이 밝은 얼굴이다. 촌장 반열의 영감님이 마을 수박농사 얘기를 자랑삼아 들려준다.

"조상대대로 담배와 고추농사를 지었으나 품이 드는 것에 비해 소출이 적어 10년전부터 수박농사를 부치고 있는데 다행히 상인들이 매년 섭섭잖게 값을 쳐주고 있지. '동면수박'이라고 하면 서울서도 인기가 좋다고 하더군"

상신촌 주변 1∼2㎞를 지근에 두고 횟골, 설매, 뱀장골, 말밭골, 애뜨미, 버내골 마을이 둘러 있다. 상신촌은 일월산으로 들어가는 길목. 피난 온 민초들이 이곳을 근거로 고만고만한 터전을 일군 것이다. 한국전쟁 직전까지 100여 가구나 모여 있었다.

횟골에서 만난 이영락(66)씨는 수백년전부터 주변 산촌에 사람이 드문드문 살았지만 마을답게 된 것은 1910년대 이후라고 말한다. 영양쪽 일월산촌 처럼 일제의 핍박과 수탈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대거 몰려 들어온 것이다.

조금이라도 평탄한 곳이라면 빼놓지 않고 화전을 놓았다. 잡곡 낱알을 거둘 수 있을 정도의 척박한 땅이였지만 난세를 잊게한 안식처요, 후일을 기약하며 새로운 희망을 가꾸는 생명의 땅이기도 했다.

화전과 화전을 잇는 여러갈래 소로는 잡초가 무성히 자라도록 등짝을 내주고 있다. 지금은 통행이 거의 없지만 옛적에는 동화재와 설매마을, 뱀장골로 거미줄처럼 이어져 산밖 사람까지 드나들도록 했다.

평생을 상신촌에 살아온 권동순(78) 할아버지는 일제때 부터 한국전쟁때까지 일월산 100리 동편의 영해 바닷가 등짐쟁이들이 소금과 생선 지고 이 길을 넘어 서편 재산·봉성장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옆에 있던 이도희(68)할머니는 "이 사람들이 마을을 지날때 종종 등짐보따리를 풀고는 했는데 돈이 귀한 곳이라 이곳의 잡곡, 고추, 약초를 내놓으면 마다않고 맞바꿔 갔다"며 한입 거든다.

등짐쟁이들은 날이 어두워 일월산을 넘지 못할때면 주막거리에서 탁주잔을 기울이며 항아리에 단지밥을 해먹고 잠을 청하고는 다시 길을 떠났다. 상신촌에서 바드실(바른골)거쳐 영양 청기면으로 가거나 70년대 동면저수지가 들어서기 전에는 설매와 동화재, 영양 수비 수실령을 넘어 평해로 넘나들었다.

풍요는 없었으나 자족하며 살았다. 그러나 산촌의 안식과 평화는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끝을 맺는다.

한국전쟁 당시 일월산을 장악하려는 국군과 인민군의 치열한 공방에 이 일대 산촌은 쑥밭이 되었다. 마을에서 전투가 벌어져 죽어가고 전란을 피해 마을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들의 수난은 전쟁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60년대 후반 울진.삼척지역 무장공비가 출현했을때 공비로 부터 화전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소개(疏開) 정책이 시작돼 살던 집이 잿더미가 되고 마을을 떠나야 했던 기구한 운명들.

말밭골에는 난리가 끝나고 재산면 소재지 등으로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 흙집을 짓고 산다. 지금 남아있는 사람들은 4가구에 10여명. 14년전부터는 이 마을에 하루 5차례 버스가 들어온다.

박종환(70) 할아버지는 "인근 붉은댕이제 넘어 외나무다리로 화전민들이 다녔지. 이 산길을 넓혀 버스길을 만들었는데 이때 포장에 쓰인 시멘트가 북한에서 수해 구해품으로 보낸 것이라 하더군. 6.25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었다"며 마른 입을 다신다.

이 길을 다니는 버스는 70년대 한때 주민들과 학생들로 꽉 채워지기도 했으나 이제는 재산면소재지로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기성(15)이와 윗미목마을의 재현(9)이 둘만 타는 대절버스처럼 됐다.

버스 종점에서 일월산 정상쪽으로 울퉁불퉁한 비포장길을 따라 2㎞떨어진 미목마을. 재현이의 아빠 심현섭(33)씨 부부가 산다. 지난 97년 부산 위생병원 원무과에 근무하다가 산좋고 물맑은 곳에서 농사짓고 사는 것이 소원이어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비닐로 감싸 비바람을 막은 집. TV는 난청지역인 탓에 화면이 지지거려 치워 버렸다. 대신 재현이의 피아노와 컴퓨터가 집안 한켠을 차지하고 있어 이채롭다. "이곳에 사는 즐거움은 말로 할 수 없지요. 어디 얽매이지 않고 한없이 자유롭다"는 심씨는 산촌생활의 자족을 이방인에게 자랑하는데 시간가는 줄 모른다.

아이 울음소리 그친지 오래인 이곳에서 실로 오랜만에 아이가 태어났다. 산촌의 적막을 깨뜨리는 새생명의 기지개. 재현의 여동생 예은이다. 다음달 2일이 첫돌인 이 아이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의 산촌민 등장을 의미한다.

70년대 중반이후 떠나는 사람들만 있었던 일월산촌에 재현이네 같은 사람들이 2, 3년 사이 10여명이나 들어왔다. 인근 찰미목에는 서울에서 중장비업을 하다 청산하고 왔다는 이(50)씨네가 산다. 조립식이지만 40평 정도의 근사한 전원주택을 지어 위성방송 수신 안테나까지 올렸다.

뱀장골의 박진우(60)씨는 역시 서울에서 다니던 회사를 퇴직한 후 산을 타던 친구들이 하늘 아래에서는 제일 평화로운 동네라는 얘기를 듣고 만년의 산촌전원생활을 하기위해 3년전 이곳에 들어왔다.

산구릉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2만평의 경지를 구입, 과수목을 종류대로 심어 농장을 만들었다. 수확한 일부는 팔기도 하지만 가족들이 먹고 동네사람들에게는 거저 나눠준다. 밀양이 고향이라 이곳과는 아무 연고도 없다. 그저 안빈낙도를 찾아 온 것이다.

일월의 산촌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속사연도 가지가지 지만 죽지 못해 사람이 모이던 그런 산촌만은 아닌듯 하다. 더욱 여유롭고 넉넉한 때묻지 않은 삶을 찾는 사람들의 입산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일월산은 이래도 저래도 그만, 관대히 몸을 내주고 있다. 세파에 지치고 생채기 난 사람들을 누구하나 내치지 않고 묵묵히 감싸며 서있다.

일월산 취재팀

정경구기자 jkgoo@imaeil.com

권동순기자 pinoky@imaeil.com

김진만기자 factk@imaeil.com

김경돈기자 kdon@imaeil.com

엄재진기자 2000ji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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