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집'은 '고향' '어머니'만큼 정겨운 말이 아닐까 싶다. 특히 농촌인구가 70~80%인 시대를 산 50대 이상엔 그 포근함이 더 할 것이다.
경북 청도군 매전면 동창천 옆에 있는 나의 외갓집에 대한 이미지는 예사 사람의 고향추억과 다르지 않다. 사립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과 외양간이 있고, 초가집 안채와 사랑채 사이 감나무 아래 언제나 찬물이 가득한 샘이 있었다.
그리고 찾아온 외손자에게 먹거리를 챙겨주시느라 분답고, 떠날때면 허리춤 삼지를 풀어 꼬깃꼬깃 접힌 지폐를 쥐어주시는 외할머니의 잔정이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엄하시긴 했어도 해어진 운동화 뒤축을 밤새 꿰매어 놓곤 하셨다.
◈감성 상실의 시대
철없던 시절 초.중.고 방학때 각인된 이 추억때문일까. 뒷날 성장해 결혼 하고서도 마음이 심란하거나 휴가철이면 나의 발길은 외갓집으로 향했다. 혼자 가기도 하고 가족동반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도 했는데 나에겐 하나의 큰 기쁨이었다.그런데 올 여름 이 기쁨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사태가 발생했다. 연전 외삼촌이 돌아가신 후 외사촌이 있던 집을 헐고 새로 집을 지었다며 초대해 갔더니 외갓집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초갓집 안채 자리엔 붉은 벽돌양옥이 우뚝 서 있고 흙벽이 유난히 투터웠던 사랑채와 외양간은 흔적조차 없었다. 샘이 있던 곳엔 감나무만 달랑 남았고 넓은 안마당은 시멘트를 발라 땅이 숨을 못쉬게 만들어 놨다.
낯선 양옥과 시멘트마당을 들어서는 순간 외갓집 이미지는 희미해지고, 양옥 거실의 샹들리에와 싱크대는 외할머니의 기억마저 의심나게 했다.
◈메말라가는 세상살이
이건 나의 외갓집이 아니다. 너무나 큰 상실감에 나는 외사촌에게 "너는 내마음속 가장 소중한 부분의 하나를 깡그리 뭉개버렸다"고 섭섭해 하자, 외사촌은 "식구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 살고 외숙모님 혼자 자투리 농사를 지으며 살기때문에 편리하게 지었다"며 나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는듯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당연한 일 일 것이다. 어떻게든 머리를 잘 굴려 경쟁에서 이기고 돈 잘 벌어 편하게 사는게 제일인 세태에 무형의 남의 추억이나 이미지 따위를 걱정해 줄 필요가 있을 것인가. 오히려 그런 것을 요구하며 섭섭한 티를 내는 내가 잘못인지 모른다그러나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무형의 것들을 우리가 너무나 등한시 하며 살아 왔기에 이 세상살이가 메말라 재미없고 힘든 것이다.
어떤 학자는 중세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은 이성과 감성을 다같이 중요시하며 살았으나 근세기들어 이성만을 떠받들며 살아온 탓에 하나님도 잊고 인간을 복제하는 등의 천박한 짓을 하기에 이르렀다고 개탄한다. 그러면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은 우리의 감성을 되살려 이성적 활동과 균형을 이루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잃어버린 감성 되찾자
8.15 이산상봉의 감동적 드라마는 편의성 합리성만을 추구하는 이성에 대한 감성의 위대한 승리였다. 생이별했던 부모, 형제, 자매간의 만남은 근세기후 이성에 기초해 만들어졌다고 자랑해 온 모든 것을 한꺼번에 녹여 버렸다. 여보, 어머니, 아버지, 오빠, 언니… 부둥켜 안는 순간, 거기엔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없었고 경제적 문화적 격차도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엔 인간 삶의 참모습이 있을 뿐이었다. 북에서 내려온 이데올로기의 '대표선수들'도 늙은 노모의 애절한 부름 앞엔 가슴을 치며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이면 처서, 한차례 비바람이 스친후 하늘도 한결 높아지고 햇볕도 추색을 띠기 시작했다. 올가을엔 우리 모두 감성을 되찾는 일을 한가지씩 해보면 어떨지. 그것은 밑에서 부터의 통일을 앞당기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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