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일월산-12

100여년 전 일월산은 사그라드는 국운(國運)을 일으켜 세우고자 봉기했던 민초들의 고향이었다.

외세의 간섭과 당쟁으로 요동치던 조선의 끄트머리. 왜적의 침략이 잦으면서 그럴 때마다 분연히 일어 섰던 일월산 의병(義兵).

왜국의 대륙침략이 노골화된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9), 임오군란과 갑오 동학혁명을 거치는 동안 나라안은 온통 외세의 총칼에 오욕의 생채기로 얼룩지고 있었다.

왜국은 농민들을 폭도로 몰아 쫓고 죽이기를 거듭한다. 1895년 민 황후(閔皇后)를 무참히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더니 급기야 을미개혁을 단행, 단발령(斷髮令)을 내려 민족정신을 말살하기에 이른다.

전국의 유림들은 의병봉기로 왜국에 대항, 구국의 혼을 일으키려 했다.

일월산 자락을 의지해 살던 영양지역 유림 김도현(金道鉉)·오석인(吳錫寅)·조병희(趙秉禧)·조영기(趙永基).

이들은 1896년 정월 17일 영양 장날을 기해 향회(鄕會)를 열고 의병대장에 일월면 주곡리 출신의 조승기(趙承基)를 선출하고 의병을 모집, 왜군들과 격전을 벌인다당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벽산(碧山) 김도현(1852∼1914)의병장. 그는 청기면 상청리에서 태어나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면서 국운이 다했음을 알고 일찌감치 지방 향리와 동지들을 규합, 병사를 단련시켜 왔다.

사재를 털어 마을 뒷산 검산(劍山)에 석축 성벽을 쌓고 의병을 모집, 군사훈련에 매진하다 단발령 발표직후 거병한다.

안동 예안과 예천, 강릉 등지로 원정 전투를 벌여 승승장구. 그러나 1896년 9월경 강릉에서 대패해 일월산으로 퇴진, 그 해 10월경 고종황제의 의병 자진 해체 권유와 위협으로 의병을 해산한다.

청기면 상청리 마을 뒷산에는 지금도 벽산이 쌓았던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검산성(경북도 기념물 65호)은 총 길이 500여m중 100여m만이 흔적을 남겼으나 이마저도 무성한 풀숲에 가리고 고추밭 둑으로 이용돼 허허로움을 더하고 있다.

안동대학교 김희곤(사학과·안동문화연구소장)교수는 "벽산은 양반·유림출신으로 보기드문 의병장"이라 평가하고 있다. "훗날 고종의 의병 봉기 유지를 받고도 군자금이 없어 통곡하다 자결하게 된다"고 덧붙인다.

1896년5월12일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 속칭 사부령에서 벌어진'사부령 전투(일명 도리깨 전투)'.

이 전투는 왜군이 벽산을 잡기 위해 거짓 정보를 흘려, 연당과 저리·상청리 등 농민들이 도리깨와 괭이를 들고 사부령으로 달려가 총칼로 무장한 왜군들과 싸운 전투. 이날 죽은 이만도 수십여명에 달해 청기천 물을 선홍빛으로 붉게 물들였다1905년11월 왜국 공사 이토오 히로부미에 의해 을사년 한일보호조약이 체결되고 통감정치가 시작된다.

조선의 임금 고종황제는 왜국의 끊임없는 내정간섭과 위협이 극에 달하자 1906년 전국의 의병장들에게 비밀리에 유지(諭旨)를 보내 기병할 것을 명하기에 이른다.이에 따라 1906년 전국적으로 의병들은 재봉기한다. 일월산을 중심으로 한 영양·봉화지역은 영해출신의 신돌석(申乭石)·안동출신 유시연(柳時淵)·수비면 심천출신의 김성운(金成云) 등 의병장들의 활약이 또 다시 빛을 발한다.

신 의병장(1874∼1909)은 1906년 3월 300여명으로 '영릉의병진(零陵義兵陣)'을 구성, 해안을 중심으로 전투에 나서 큰 전과를 거두는 등 한 때 의병수도 3천을 헤아리기에 이른다.

그는 그 해 11월부터는 일월산과 백암산으로 군대를 이동, 근거지로 삼고 본격 유격전에 돌입했다.

당시 경북도 관찰사 박중양(朴重陽)이 고등경찰에 보낸 보고문에는 "1907년8월20일 신돌석은 300여명을 이끌고 영양읍내에 들어와 분파소(경찰 수비대)를 습격, 파괴하고 경비대원 수명을 사살하고 관가를 불살랐다"고 기록,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다.

김 교수는 "일월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의병들은 일월면 용화리 아랫대티와 윗대티를 거쳐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우련전) 계곡을 따라 남회룡리와 울진군 삼근리 불영계곡으로 이어지는 이동로를 이용했다"고 밝힌다.

유시연(1872∼1914)과 김성운(?·생몰연대 미상) 장군의 의병활동은 1908년에 들어서면서 일월산 주위로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일제 경상북도경찰부가 펴낸'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에는 "명치41년(1908년)본도 북부 일월산 부근에 이강년·신돌석·김성운·유시연 등이 출현해 2월15일 토벌에 나서 6일만에 150여명을 살해했다. 신돌석은 영해방면으로 김성운은 울진, 유시연은 영양과 안동간 지역으로 이동했다"고 적었다.

'한국독립운동사'8권엔 유시연 의병장도 부하 500여명을 이끌고 12월24일 북이면(현 일월면)주곡동에 도착했으며 주민들은 곡식과 돈을 거둬 군자금으로 했다고도 나타나 있다.

융희2년인 1908년 2월14일 영주경찰서장은 봉화지역 일월산인 동남지방과 영양군 수비면지역에 신돌석장군과 김성운장군이 이끄는 의병 200여명, 일월산 남쪽능선인 태두(太頭)와 사곡(寺谷)지방에 유 의병장의 100여 의병들이 주둔했다고 보고한다.

왜군은 이들 의병장들의 군대를 공격하기 위해 예천수비토벌대의 지원을 받아 15일에 공격할 계획을 세우면서 일본과 한인 경찰 각 1,2명을 한조로 편성한 '위장부대'를 주요 부락에 배치해 의병진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한국독립운동사 의병활동 자료편(8~12권)에는 이들 3명의 의병장들의 활동을 엿볼 수 있으며 영양군 수비면과 청기면, 봉화군 재산면과 소천면, 영덕군·울진군, 안동시 예안면 등의 지역에서 1906년부터 3년여 동안 왜군과 격전을 벌였다.

김 교수는 "이들 의병들은 초기와는 달리 후기에 들어서면서 용병(傭兵)의병의 등장, 장기간 보급지원으로 지역민들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보급전이 여의치 못하는 한계를 가져오게 된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의병장들은 곳곳의 전투에서 체포되거나 사살되고 어떤 이들은 동족들의 배신으로 인해 체포·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같은 무수한 의병들의 피흘림에도 불구, 1910년 경술년 한일합방(경술국치)이 체결된다.

일제강점과 민족분단, 동족상잔의 한국전쟁, 이산가족들의 한 맺힌 역사의 어둡고 긴 터널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전국의 유림들과 의병들은 나라잃은 슬픔에 자결하거나 세상을 등지고 만다.

오로지 나라를 위한 길에 분연히 나섰던 농투성이 민초들. 자신의 가산을 탕진하면서 국운을 일으켜 세우려 했던 수많은 유림들. 이들의 한은 일월산 산천의 풀한포기와 돌하나 나무 한그루에도 맺혀 지금도 흐느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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