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北 의뢰 2차 이산상봉 명단 대구.경북출신 24명 왜 많을까

'북측 방문단, 왜 대구가 많을까'지난 8.15 이산가족 상봉과 지난 2일 공개된 북측 생사확인 의뢰자 명단에 이어 27일 발표된 2차 이산가족 상봉단 후보중에서도 대구.경북지역 출신이 24명으로 경기(47), 서울(26명)에 이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8월15일부터 나흘간 이뤄졌던 이산가족 상봉에서는 북측 방문단 100명 가운데 대구.경북 출신이 17명으로 최다를 기록했다. 또 지난 2일 공개된 북측 생사확인 의뢰자 명단에서는 지역 출신이 15명으로 서울과 함께 가장 많았다.

전문가들이 분석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먼저 6.25전쟁 당시 전국 인구분포에서 대구.경북이 가장 많았다는 점이다. 통계청 경북통계사무소에 따르면 1949년 당시 전국 인구는 2천16만6천여명 정도였으며 이 가운데 경북이 320만6천여명으로 전국 시.도 중 가장 많았다. 이어 경남 313만4천여명, 전남 304만2천여명, 경기 274만명 순이었다.

따라서 인구가 타 시도보다 많았던 만큼 이런저런 사정으로 월북한 인사들도 많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다.

또다른 이유는 1946년에 일어났던, 10월 민중항쟁이라 불리기도 하는 10월 폭동이 꼽힌다.

10월 폭동은 미군정의 실정으로 인한 물가상승과 식량난, 실업난 등으로 축적된 시민들의 분노가 10월1일 대구.경북지역 노동자.농민.학생의 대거파업으로 시작, 12월 중순까지 전국에 걸쳐 발생했던 사건.

미 군정은 이에 대해 계엄령을 선포하는 한편 폭동의 진원지였던 대구에서 강력한 좌익 탄압에 들어갔다.

계명대 사학과 이윤갑(44) 교수는 "당시 미 군정의 대대적인 탄압을 피해 월북한 지역 좌익계 인사가 상당수 있었다"며 "서울 등 국내 다른 지역으로 피했던 인사들도 6.25전쟁을 전후해 결국 월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상헌기자 dava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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