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문신불애전

한국사의 '신라'편, 화랑 관창의 기록을 읽다보면 진한 감동을 받게된다. 어린 나이에 용장 계백의 진중에 뛰어든 관창의 의기도 그렇지만 선봉장 품일(品日)이 밀리기만 하는 신라군을 분기시키기 위해 아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장면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요즘으로 치면 1군이나 3군 사령관쯤 되는 좌장군 품일이 15세에 이미 무열왕의 부장(副將)으로 발탁, 장래가 확실하게 보장된 그 자랑스런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때의 그의 심경을 상상해 보라.

신라군 전체에서 '가장 미쁘고 꽃다운' 내 아들 관창이 아니고는 어떤 속죄양으로서도 전군(全軍)을 뭉치게 할 수가 없음을 깨닫는 순간 결단을 내린 품일의 자세야말로 시체말로 노블리스오블리제(지도계층의 도덕적 의무)의 극치가 아닐는지.인도는 간디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그를 구심점으로 수백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종족을 한데 묶어 지금과 같은 대국으로 이끌 수 있었다. 일본 또한 사이고다카모리(西鄕隆盛) 같은 사심없는 이상주의자로 말미암아 근대화에 일찍부터 성공할 수 있었던 거였다.

결국 고금동서 어떤 나라일지라도 그 지도자들이 펄펄 살아서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위기때는 서슴없이 자신을 던져 희생할 때 그 나라는 진운을 받는 법이다.

요즘 우리 사회가 흔들린다고 걱정의 소리가 높다.

어떤 이는 국정 운영의 미숙함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 혹자는 인재등용의 실패 때문이라고도 한다. 모두가 그럴듯한 말이다.

##권력형비리 국기위기 불러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지도계층의 도덕적 해이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IMF 같은 국난기엔 무엇보다 지도계층이 근신하고 노심초사 하는 자세로 백성을 감동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게해야 신명 많은 이 백성들이 "지도자가 저러는데…"하면서 가시밭 길을 마다 않고 다시 뛸것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감동은 커녕 불신만 증폭 시키고 있는 것 같으니 걱정스럽다. 남송의 명신 악비(岳飛)는 벼랑 끝에 선 조국을 구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관리가 돈을 좋아하지 않는것'(文臣不愛錢)이라고 간단히 답변했거니와 지난 2년여동안 이땅의 지도자들은 과연 이 짤막한 화두(話頭)로부터 당당할 수 있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현 정권은 출범 초기부터 유종근 지사 관사 절도사건, 옷로비 사건 등으로 "어쩐지…"싶더니 그뒤를 이어 터져나오는 권력형 비리에는 이러다 나라가 어떻게 되는게 아닌가 싶은 막된 생각마저 갖게된다. 대형 비리가 터질때마다 검찰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났다"는 식으로 권력 실세들에게 면죄부를 주기에 바빴던게 저간의 사정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번 두번이지 잇따르는 부패 스캔들은 "하필이면 굴뚝 근처에 가서 일부러 사서 곤욕을 치르는 권력 실세가 왜 이리 많은가"하는 의문과 함께 현집권층이 어쩐지 '불애전(不愛錢)'과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110조의 공적 자금을 투입, 수십조가 증발했고 그러고도 모자라 60조원의 공적자금을 더 투입해야 한다고 걱정이 태산이다. 이런 터수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권력형 비리마저 잇달아 터지는데도 집권층의 개혁의지를 믿고 따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 아닐까. 지도자가 훌륭한 덕성과 좋은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추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지도층의 도덕적 책임 절실

그러나 그보다도 금덩어리를 돌처럼 볼 수 있는 붉은 마음으로 민심을 얻는 것이 지금같은 국난기(國難期)에는 더욱 중요하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절실히 필요한 지도자는 경제 전문가나 행정의 달인이 아니다. 그보다는 신라의 저 굳센 품일장군처럼 "나는 모든 것을 버렸다. 그러니 나를 믿고 따르라"고 전국민을 분연히 떨쳐 일어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구한말의 매천(梅泉) 황현선생은 자신의 절명시에서 '가을밤 등불아래 책을 덮고 지난 천년을 회상하니 인간으로서 선비(지도자) 노릇하기 정말 어렵구나(秋燈掩卷 懷千古 難作人間 識字人)' 라고 탄식했다. 구조조정에 영일이 없는 우리 지도자들에게 지도자의 자세가 어떠해야하는지 꼭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은 구절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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