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종교
종종 과학과 종교는 서로 적대적이라는 주장을 들을 수 있다. 이처럼 잘못된 말을 찾기도 쉽지 않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갈릴레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 등의 몇몇 사례를 든다. 문제는 아무리 많은 사례를 나열한다고 해도 과학과 종교가 본질적으로 적대적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순한 귀납만으로는 어떤 것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학과 종교가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사례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양자가 근원적으로 비슷한 속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과학과 종교가 지닌 공통점 중의 하나는 '초월'의 추구이다. 종교인은 초월적인 존재(대개 신)에 귀의하거나 동화됨으로써, 구원이나 해탈을 통해 자신도 초월성을 얻으려고 한다. 과학자도 비슷한 이상을 지닌다. 과학의 대상인 자연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사람(즉 과학자)의 의지나 희망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자연을 대상으로 과학은 영원과 다름없을 정도로 먼 과거로부터, 경계를 확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우주에서,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멀고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현상들 속에서 만물이 움직이는 원리들의 관계를 탐구한다. 과학자는 그러한 원리와 원리들의 관계를 찾아냄으로써 영원불변해 보이는 자연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을 통해 과학자 개인이 직접 초월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압도하는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자연에 접근함으로써 희열을 느끼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종교인의 태도와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이것이 전통적인 '진리 탐구자'로서의 이상적인 과학자상이라고 할 수 있다.앞에서 이야기한 종교와 과학의 모습은 주로 유럽에서 성장한 종교와 과학을 상정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과학의 성전'이야기는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신약성서를 읽어 본 사람은,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성전의 정화(淨化)가 예수가 예루살렘의 성전에 들어가 상인들을 내친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라는 점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특정 종교의 신자였던 적이 결코 없는 아인슈타인이 과학을 대하는 마음의 상태가 서구의 종교인이 신앙의 성전을 대하는 마음과 거의 같았던 것이다. 과연 다른 문화권에서 발생한 종교와 과학에도 앞의 논의가 적용될 수 있는지는 앞으로도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나 밝혀질 것이다. 왜냐 하면, 현대의 종교관과 과학관이 서유럽 문명의 종교관과 과학관에 압도적인 영향을 받고 있어서, 종교나 과학에 대한 현대의 논의가 보편적인 종교 또는 보편적인 과학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결국은 서유럽의 종교와 과학에 대한 것인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좀 더 극단적인 주장을 펴는 학자들 중에는 과학이나 종교라는 것이 문화권마다 보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활동이 아니라 서유럽 문화 특유의 것이고, 근대 세계가 형성되면서 서유럽 문화가 패권을 쥐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도 과학과 종교를 인류 문명의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인 활동으로 여기게 되었을 뿐이라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설사 그들의 주장이 옳다고 하여도, 앞 논의의 가치가 크게 손상 받지는 않는다. 왜냐 하면, 아무리 서유럽 문화의 압도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영향을 통해서 형성된 과학관과 종교관은 엄연히 지금 우리의 것이고, 서유럽 문화의 고유 특질이라는 것들과 비슷한 요소들을 다른 문화권에서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 지식 자체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점이다. 과학 지식은 완전하지도 않고, 영원 불변하지도 않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한때 옳다고 여겨지던 과학 지식도 다음 시대에 틀린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가 많다. 현대의 어느 과학자도 감히 자신의 연구가 자연의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 준다고 말하지 않는다. 즉 언제 어느 순간에나 과학은 항상 잠정적인 것이므로 누구도 확실한 지식을 자신할 수 없다.
그렇다면 불확실한 과학을 통하여 어떻게 초월적인 것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 달리 말하면 새로운 과학적 지식이, 과거의 과학적 지식에 비해서 상대적으로라도, 자연의 참모습에 좀더 가깝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 모두가 동의하는 명쾌한 답은 없고 무수한 논의들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과학이 점차 자연의 참모습에, 그것에 결코 도달할 수는 없을지라도 접근하여 간다는 믿음의 근저에 자연은 하나라는 신념이 있다는 점이다. 이 믿음은 자연과 과학자의 관계를 마치 옛 이야기에 나오는 코끼리와 맹인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 본다. 다른 점은 이야기 속의 맹인들은 서로 자기가 만져 보고 안 것이 코끼리의 진정한 참모습이라고 다투었지만, 과학자들은 자신이 연구한 결과가 자연 전체에 대한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지식일 뿐이라고 인정하고 서로 협력하고 토론하여 좀더 나은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인정하는데 있다. 이야기 속의 맹인들이 협력하고 토론하면서 자꾸 더듬어 본다고 하더라도 눈으로 보는 코끼리의 모습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며, 때로는 옳은 결론에 도달하였다가도 다시 틀린 주장을 옳다고 여기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들이 만져서 알아 낸 코끼리의 모습은 점차 다른 사람이 보는 모습과 비슷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과학자들도 자연의 참모습을 완전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를 넘어 계속되는 협력을 통하여 한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꿈꿀 수 없는 차원에서,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더욱 낫다고 합리적으로 믿을 수 있는 지식을 얻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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