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고구려 옛땅을 가다-(18)남한의 고구려 유적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고구려의 상당수 유적은 중국과 북한 땅에 남아 있다. 하지만 한강이남에도 일부 유적이 남아 있어 고구려의 강성했던 국력을 실감케 한다한강 부근은 일찍부터 고구려.백제.신라가 뺏고 뺏기는 각축전을 벌였던 지역이지만 고구려가 충청도 유역까지 진출해 상당기간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중원고구려비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 입구에 서 있는 이 고구려비는 국보 205호로 지정돼 있다. 비를 보는 순간 중국 집안(集安)에서 봤던 광개토대왕비를 축소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높이 203㎝, 너비 55㎝.

비의 재질은 견고한 화강암으로 돼 있으나 세월의 풍상을 견뎌내지 못해 글자를 거의 알아 볼 수 없는 상태.

이 비는 발견 당시 마을의 지주석으로 마을 입구에 서 있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입석리로 했다고 한다. 한 때 마을 대장간의 기둥 역할도 했단다. 이 때문인지 글자가 있던 4개면 중 2개면은 완전히 마모돼 버렸다.

이 비석이 고구려비임을 가장 먼저 확인한 정영호(전 단국대교수)씨는 "발견 당시인 1979년 마을의 가장 나이 많은 노인에게 확인한 결과 대장간에서 담금질을 한 뒤 날이 섰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농기구를 이 비석에 대고 쪼는 것을 보았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 비석은 고구려 비 가운데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것. 이선철 충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고구려 세력이 설마 이곳까지 미쳤겠느냐는 생각 때문에 발견 당시에는 진흥왕 순수비로 오인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전면부에 있는 글자의 첫 표기가 '오월중 고려대왕(五月中 高麗大王)…'으로 해석되고 고구려의 관직을 나타내는 '사자(使者)',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등이 표시돼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고구려 비로 굳어졌다. 고려라는 국호는 장수왕 이후 고구려의 공식 국호로 사용됐다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실제 중국의 고대 기록들에도 고구려 보다는 고려라는 이름이 더 많이 등장한다.

글자 확인이 제대로 안돼 정확한 해석이 불가능하자 고구려연구회(회장 서길수 서경대 교수)는 지난 2월 초음파 검사를 벌인데 이어 11일 레이저 장비를 동원, 해독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장미산성

충주시 가금면 입석마을 중원고구려비에서 제천 방면으로 3km쯤 가다보면 가금면 장천리 왼쪽 편에 있는 산이 장미산. 337m정상에 고구려 때 성인 장미산성이 있다. 성벽 높은 곳은 5m 정도였으며 성의 폭은 좁은 곳이 5m, 넓은 곳은 10m에 이르렀단다. 성의 총둘레는 2천940m. 산성주변에 많은 건물지가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아직도 성벽이 일부 남아 있다.

◇국원성

중원고구려비 근처에는 중원탑(국보6호)이 있는데 당시 이곳 공원 조성 공사를 하던 80년대 당시 탑 구근에서 '육엽단판연화문수막새'라는 와당이 발견됐다고 한다. 이런 유물들을 토대로 이 지역은 한 때 고구려 세력이 번성했던 지역으로 분류된다.

고구려가 충주 지역을 장악한 것은 장수왕 즉위시. 당시 고구려는 이곳을 '국원성(國原城)이라 했다. 나라의 근원이 되는 땅이라는 뜻. 고구려는 이를 기념하고 상징하는 비를 세웠는데 이것이 중원고구려비다.

신라와 고구려가 이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각축을 벌인 것은 교통의 요충일 뿐만 아니라 양질의 철이 생산되는 우리나라 3대 철산지의 하나였기 때문. 몇년전까지만해도 충주시 이류면이나 가금면 등지에서는 철광산이 운영됐다.

◇영주시 순흥 벽화고분

경북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비봉산에 자리잡은 남한 지역에서 유일하게 고구려 벽화가 발견된 고분. 이 고분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능선을 따라 10여기가 봉토를 이루고 있다.

벽화는 묘실의 네 벽면과 널길의 동서벽, 묘대의 서쪽 면 등 7면에 그려져 있다. 동벽에는 토굴 구덩이가 뚫려 있어 훼손이 심한 편. 고구려 벽화에 많이 나타나는 삼족조(三足鳥)가 있는 일상적인 벽화와 산수화가 그려져 있다.

그림을 그리는 기법은 먼저 묵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그 안에 적갈색의 물감으로 채색하는 방법을 취했다. 그림의 내용이나 필치는 고구려 고분 벽화를 그대로 닮고 있다.

이 고분은 연대 문제와 묘 주인이 누구냐는 문제로 학계의 논란이 분분한 상태. 연대가 중요성을 띄는 것은 고구려와 신라의 영토와 관련된 문제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 현재 학계에선 신라의 관직명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신라 때 축조가 됐지만 고구려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던 지역으로 보고 있다.

영주시는 벽화가 심하게 훼손되자 원고분은 완전히 봉쇄해 놓고 있다. 마을 어귀에 모조 고분을 만들어 사본을 걸어놓고 있다. 사전에 순흥면(054-633-3003) 사무소에 연락하면 관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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