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시의 한 관문인 수능 평가가 끝났다. 문제가 너무 쉬워 학생들의 실력 차이가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그러한 논란이 존재하는 한, 학교교육이 공부 잘 하는 학생들과 못 하는 학생들을 '걸러내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누구나 소중하고 누구나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교생들이 일단 대학에 진학을 한다고 해서 이제까지 미루어 왔던,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취업 문제라는 먹구름이 코앞에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한편, 대학 입시 시절인 요즘, 각종 업체들로부터 취업 원서들이 한창 학과 사무실로 들어온다. 졸업을 앞둔 학생들 중에서 '좋은' 일꾼들을 추천해달라는 것이다. 한두 곳도 아니고 여러 곳에서 원서들이 온다. 하지만 졸업생 수에 비해서는 이 원서들의 수가 턱없이 모자란다. 학과도 제법 '잘 나가'는 학과인데도 그렇다. 또 원서를 낸다고 모두 합격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 경제가 한창 팽창을 할 때만 해도 졸업과 동시에 거의 자동으로 취업이 되었다. 내가 학교 다니던 80년대 초만 해도 '좋은' 직장을 골라서 갈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사정은 많이 달라졌다. 그래서 대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은 졸업 시즌이 되면 학부모들과 마찬가지로 한 걱정을 더 하게 된다.
해마다 전국에서 20만~30만 명 정도의 대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들을 받아줄 수 있는 일자리는 기껏해야 20~30% 정도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졸업은 곧 취업이 아니라 '졸업=실업'인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IMF 시대' 이전부터 나타난 것이긴 하나 그 이후로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기업, 공공, 금융, 노동 등 각종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갈수록 많은 일자리를 축소할 뿐만 아니라, 있는 일자리조차도 노동의 유연화라는 이름 아래 비정규직으로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들어 기업 퇴출 및 구조조정 여파로 대기업들조차 신규 채용 규모를 줄이거나 취소하기도 한다. 예컨대 대우자동차는 원래 11월중으로 1천명을 선발하려 했으나 부도나는 바람에 백지화되었고 삼성그룹도 원래 2000년 하반기에 4천명을 뽑으려 했으나 그 절반만 뽑고 말았다. 은행 등 금융계도 채용을 거 의 중단한 상태인데, 주택은행의 경우 당초 하반기 200명 채용 규모를 절반으로 줄이고 말았다. 한국통신과 한국전력 등 공기업도 민영화 및 구조조정 과정에서 신규 채용을 극도로 억제한다.
노동시장 사정이 이러하니 학생들은 패기와 낭만 속에 '행복 찾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도서관과 강의실을 왕래하며 오로지 취업 준비로 꼬박 4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입시 과정에서 학생들을 면담하면, "진리 탐구를 위해서 혼신을 다하겠다", "한국 기업의 고질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겠다", "한국 경제의 체질 개선에 일익을 담당하겠다"는 식의 큰 뜻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일단 입학해서 학교를 다니면 기본적으로 (대학 생활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오는 환멸감에다 현실적인 '취업 전쟁'에 대비해야 하니, 갈수록 자신의 뜻을 굽혀야 하고 대학 생활도 '재미없게' 해야 한다.
그런데 가끔 (졸업을 몇 달 앞둔) 학생들이 찾아와서 '취업이 빨리 되어 수업에 들어오지 못하겠다'고 상의하러 온다. 한편으로는 축하를 해주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어디까지 축하를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남은 수업을 듣지 못하게 되어 섭섭해서가 아니다. 취업 자체는 기쁘지만 취업 이후의 생활이 과연 이 친구에게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그 친구의 자세와 능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구조조정과 경영혁신의 회오리가 기업 조직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의식·무의식 세계에까지 휘몰아치는 이런 세상에서 과연 그 누가 행복한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도 '경영과 노동의 현실이 이렇게 힘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할 지 모른다. 그래서 이 친구는 취업 이후로 미루었던 '행복 찾기'를 또다시 정년 이후로 미루어야 할 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 학생들이 취업이 되어도 걱정, 안 되어도 걱정이다. 결국, 오늘의 행복을 절대 내일로 미루어선 안 되겠다.
고려대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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