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예부터 유독 시작에 큰 의미를 두는 민족이다. 이른 아침엔 나쁜 말을 삼갈 뿐 아니라 듣고 싶지도 않다. '아침부터 재수 없게'라는 말이 있지만 '좋지 않은 일'을 하지도, 당하지도 않으려 한다. 정초에는 이런 풍습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 때문인지 우리에겐 정초에 상대가 평소에 바라던 일이 이루어진 것처럼 여겨서 축하하거나 소원 성취를 기원하는 말인 덕담(德談)을 나누는 미풍양속이 있다.
서양에도 새해 인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처럼 구체적이고 상대에 따라 다른 인사법을 가진 나라는 흔치 않다. 어른에게는 '부디 오래오래 사십시오'라고 하고,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에겐 '올해는 꼭 쾌차하십시오'라고 인사한다. 우리의 이런 세시풍습은 언령관념(言靈觀念)에서 비롯되고 있다. 말에는 '신비스런 힘'이 있다고 믿어 왔기 때문이다.
이즈음 설날에 가장 많이 쓰이는 덕담은 '새해 복 많이 받아라'(43.2%)이며, '결혼하라'가 2위지만 이 말이 처녀.총각들에겐 가장 큰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모양이다. 한 결혼정보서비스 업체의 조사에 따르면 미혼 남녀들이 듣기 싫은 덕담은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해라'(35.5%) '취직해라'(20%) '철 좀 들어라'(18.2%) 순인 반면 듣기 좋은 덕담은 '소원 성취해라'(22.3%) '얼굴 좋아졌구나'(18.0%) '건강해라'(15.2%)다.
덕담도 세태를 그대로 반영하는지, 미혼 남녀들이 가장 싫어하는 덕담이 결혼.취직.철듦과 관련돼 있다. 이 같은 사실은 그런 일들이 가장 부담스럽거나 잘 안되는 데서 비롯되고 있는지 모른다. 누구나 '아주 좋은 운수'나 '부(富)의 상징'으로 풀이되는 '복(福)'을 빌고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오늘의 세태가 지나치게 수복강녕(壽福康寧)에만 기우는 감이 없지 않다.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생활규범으로 삼았던 옛 선비들은 부귀를 가벼이 여겼다. 영조 때의 가객 김수장(金壽長)은 '부귀를 부러워 하나 안빈이 어떠하뇨'라고 노래하면서 '탈속'의 유유자적한 삶을 권했다. 성경도 '참된 복이란 이기적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희생적인 데서 온다'고 전한다. 이기주의로만 치닫는 세태와 이즈음 덕담 풍습을 보면서 '분수를 지키며 살아가는 도리가 가장 값진 복'이라는 말을 떠올린다면 너무 고답적이기만 할까.
이태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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