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아이야 혼자서렴

식사시간에 집을 비우는 것은 주부로서 개운치 않은 일이다. 아이들은 도무지 뭘 혼자 해결하려드는 법이 없다. 전화통만 붙잡고,우린 뭘 먹어? 라면 어딨어? 어떻게 끓여? 물을 얼만큼 부어야해? 등의 질문만 퍼부어댄다.

그때 나는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언제까지 우리가 너희들 곁에 있을 순 없어, 그게 내일이 될지 모레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나는 선뜻 그 말을 할 수가 없다. 아이들에게 가슴을 아리게 하는 그런 막연한 두려움을 안겨주는 일이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훨씬 더 냉정하다. '내일'이란 단어를 쓰는 일조차 망설여야할 정도로 미래는 불투명하다. 큰 국제 정세나 환경문제 같은 것을 들지 않더라도, 우리 작은 개인에게도 '내일'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휘돌아가는 세상 한가운데 홀로 덜렁 던져지면 아이는 그때도 전화통을 붙잡고, 물을 얼만큼...하고 질문할 수 있을까. 뭐든 전화 수화기를 들면 다 해결되고, 마트에 갔다오면 먹을 것이 잔뜩 쌓이고, 세탁소에 다녀오면 빨래는 오케이가 되는 식만 보고 있지 않은가.

난 가끔 아이에게 요리를 가르친다. 아주 작은 것을 알려주면서 혹,큰 것을 동시에 가르칠 수 있을까,하는 욕심에서이다. "이렇게 하는 게 늘 해오던 방식이지만, 이게 없을 땐 이렇게도 할 수 있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삶의 융통성을 보여주고자 함이다. 융통성이 발휘될 때 삶이란 것이 편리해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겨우 짐작한 것이다. 환경에 맞춰 대처하는 것, 위치를 바꿔보면 다른 방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어쩌면 항상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는 엄마, 언제든 팔을 뻗으면 되는 장소에 있는 엄마가 되어주지 못하는 내 변명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내가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며, 언젠가는 아이들도 혼자 서야 할 것 역시 사실이다. 물론 끼니를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독립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아프게나마 홀로의 삶을 터득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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