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삶-직장인들 낮시간 풍속도

지난 18일 오후, 386세대의 추억이 담긴 영화 '친구'를 상영하는 ㅁ극장.평일 오후라 썰렁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게 웬일? 빈 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붐볐다.

눈에 띄는 것은 말쑥한 정장차림의 젊은 직장인들.

자신을 자동차 영업사원이라고 소개한 김형민(32·가명)씨는 "외근 일이 다 그렇듯 업무시간 중 자투리시간이 자주 생기는데 그럴때면 영화관이나 비디오방을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구조조정 등의 여파로 열악한 근무환경 속에 처해진 샐러리맨들. 특히 외근 직장인들의 낮생활은 어떨까.

일의 성격상 딱히 정해진 업무시간이 없는 외근 직장인들은 '스케줄 관리'를 통해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경우가 많다. 거기엔 학창시절 '땡땡이'(수업 빼먹기)칠 때와 비슷한 짜릿한 쾌감도 부인할 순 없다.

천태만상인 '그들만의 시간'을 따라가 본다.

어쩔 수 없이(?) 술에 찌드는 밤생활에 익숙해져야하는 남성직장인들. 그들에겐 숙취 후의 이튿날이 괴롭기만 하다. 이 때문에 그들은 틈만나면 저마다의 '비트'(비밀아지트)에서 낮잠을 즐긴다. '누구도 그들을 말릴 순 없다'.

자동차 안, 사우나, 비디오방, 이발소….

제약회사에 근무하는 최동찬(29·가명)씨. 최씨는 참을 수 없이 졸음이 엄습해 올 때면 오전 업무보고를 마친 뒤 회사 주차장에 세워둔 승용차에서 잠을 보충한다. 1급 비밀(?)이지만 때때로 핸들을 집으로 돌려 1시간 정도 숙면을 취할 때도 있다.

최씨는 "사우나를 즐겨 이용했는데 어느날 휴대폰을 받지 못해 상사에게 꾸지람을 된통 들었죠. 그 후론 언제나 제깍 연락이 가능한 자동차 안에서 낮잠을 잡니다"라고 말했다.

건설업체 직원 정상태(40·가명)씨는 대낮에 버젓이(?) 여관에 출입한다.

"1만원이면 샤워도 하고 편안하게 1, 2시간 휴식을 취할 수 있어 좋습니다. 공짜로 비디오 영화도 볼 수 있고요. 동료와 함께라면 비용이 절반으로 줄죠".

짬짬이 취미를 추구하는 부류도 있다.

보험회사 생활설계사인 김인철(34·가명)씨는 오전 11시쯤이면 친구나 직장 동료와 함께 당구장에 간다. 당구 두세 게임을 가쁜하게 즐긴후 짜장면 등으로 식사를 해결하고 양치질까지 끝낸 뒤 상쾌한 마음으로 오후 일을 시작한다.

건설업체 수주담당 이원철(33·가명)씨는 PC방 단골. 인터넷 게임인 '스타크래프트'나 고스톱 게임을 즐긴다. 때로는 재미있는 읽을거리를 찾아 각종 사이트를 종횡무진 돌아다닌다.

낮시간 활용이 다양한 남성직장인들에 비해 여성직장인들은 업무시간 중 여가를 즐긴다는 게 간단치 않다. 사우나를 가려해도 몸만 가면 되는 남성과 달리 목욕용품을 챙겨가야 하고 화장과 머리손질까지 감쪽같이 해야하므로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무리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게로 감겨들어도 아무데서나 낮잠을 즐길 수는 없다.

출장이 잦다는 김민희(28·가명)씨는 외근 중 짬이 나면 친구를 만나거나 쇼핑을 한다. 가끔은 혼자 커피숍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기도 한다.

운동을 하거나 어학공부를 하는 등 자기계발에 노력하는 유형도 있다.

무역업체에서 외근을 하는 하종일(30·가명)씨는 일주일에 사흘은 영어실력을 배양하기 위해 학원에 다닌다. "퇴근 시간이 일정치 않아 저녁때 학원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어차피 생기는 자투리 시간, 자기계발에 활용한다면 회사로서도 덕이 아닙니까".

신용카드회사에서 일하는 송승철(34·가명)씨는 1시간 이상의 여유만 생기면 공공도서관에 간다. 특정 도서관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도서관을 찾는다. 불투명한 자신의 앞날을 준비하기 위해 틈틈히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지금의 회사가 나의 생계를 평생 책임져 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시험준비를 하고 있지요. 공공도서관에 가면 공짜로 인터넷을 사용할 수도 있어 마땅히 갈 곳 없는 외근 직장인들에겐 더 없이 좋습니다".

그런가하면 제약회사 영업사원인 이동철(36·가명)씨의 경우는 아주 독특하다. 이씨는 1주일 일할 분량을 2, 3일만에 억척같이 해치우고 나머지 2, 3일 정도는 시골 고향에 간다. 고향에서 홀로 힘들게 농사짓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서이다. 일의 특성상 오후에 회사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고향 앞으로 가!'가 가능하다는 것. 효자인 이씨는 자신의 업무를 소홀히 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상사나 동료들 몰래 고향에 다녀오는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고 털어놓았다.

이처럼 적지않은 외근 직장인들은 저마다 다른 색깔로 자투리시간을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업무시간 중 낮잠을 자거나 딴 일을 한다고 해서 이들을 '게으른 자'들로 매도하거나 회사에 대한 주인의식이 부족하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기자가 만난 외근 직장인들은 적어도 주어진 일에 대해선 최선을 다해 칼같이 일하는 '성실한 월급장이들'이었다.

"치열한 경쟁을 요구하는 이 사회에서 일을 제쳐놓고 딴청 피우는 '간 큰 남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업무 시간 중 자기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일을 계획적이고 집중적으로 해야 가능하죠". 이원철씨의 자기 변론이 궤변만은 아닌 듯하다.

김교영기자 kimk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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