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베스트 셀러 조작

고려 때 문인 이규보는 2천 수의 시를 남겼지만 실제 쓴 작품은 1만 수가 넘는 것으로 알려진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 '노틀담의 꼽추' 등의 소설로 유명하지만 시만도 15만3천837 편을 썼다고 한다. 73세까지 산 이규보는 평생 하루에 1수, 82세에 타계한 위고는 하루 7편 꼴의 시를 쓴 셈이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집이 몇 부가 팔렸는지는 기록이 없다. 심지어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는 '1백 사람이 한 번 읽는 시가 아니라 한 사람이 1백 번 읽는 시'를 쓰려고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문학작품도 상품화되고, '베스트 셀러'라는 개념이 생겼다. 미국의 경우 1970년대 초에 '러브 스토리'가 800만부, '대부'가 300만부가 팔렸다지만, 다른 나라에 번역돼 나간 것까지 보태면 실제 판매 부수는 최소한 3배는 넘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산업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무수한 베스트 셀러들이 명멸했으며, IMF 체제 이후 사정이 크게 악화되긴 해도 그 행진은 계속되고 있다.

▲베스트 셀러는 작가.출판사에 큰 돈을 만들어 주고 독자들에게도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런데 그게 바로 문제의 불씨가 되고 있다. 작가와 출판사들은 인기에 영합하고, 나아가서는 베스트 셀러 만들기에 혈안이 된 나머지 과장 광고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서 교묘한 방법으로 '조작'을 일삼기까지 한다. 이런 풍토 때문에 우리의 독서 분위기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지경에 이르고, 끊임없는 논란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악화'가 판을 치는 양상이다.

▲출판사들이 출간한 책을 대형서점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올리기 위해 대량으로 되사들이는 '책 사재기'가 요즘 더욱 극성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서점들과 짜고 아예 책은 오가지도 않은 채 신용카드 결제 등으로 '위장 거래'를 한다는 소문까지 나돈다. 이쯤 되면 출판사 직원이나 아르바이트생들을 동원, 고객을 가장해 책 되사오기를 하는 것은 이미 고전적인 수법이다. 유수한 대형서점들까지 이를 조장한다니 정말 기가 찬다.

▲요즘 책이 너무 팔리지 않고, 출판사들이 광고 효과를 보기 위해 엄청난 돈을 지불할 능력도 없다는 점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베스트 셀러를 조작하는 '책 사재기'로 독자들을 우롱하고 사기를 벌여서야 되겠는가. 출판계 일각에서 자성의 소리와 함께 근절책을 찾으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 같은 조작은 일시적인 효과를 가져올 뿐 장기적으로 보면 독자들의 불신이 커져 결국은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태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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