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교실밖의 넓은 세상-청소년 문화센터 우리세상

◈학생 눈높이에 맞춘 문화 도우미

"길 모퉁이를 돌아 건물이 보이는 순간 공부와 시험, 학교 생활의 답답함이 말끔히 사라집니다. 나를 아는 친구들과 이해해 주는 선후배들이 있고 무엇이든 즐겁게 할 수 있으니까요".

낡은 건물. '대구 청소년 문화센터 우리세상'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컴컴한 입구를 지나 계단을 올라 서면서도 "이곳의 무엇이 학생들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일까" 의구심은 떠나지 않았다.

30평쯤 될까 한 2층의 사무실 문은 열려 있었다. 마치 도심의 도로 한가운데 서 있는 기분. 정리하기 힘들어 보이는 자질구레한 물품 사이로 연신 왔다갔다 하는 중고생들, 여기저기 떠들썩한 가운데서도 PC 앞에 머리를 맞댄 학생들은 뭔지 모를 토론에 빠져 있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려 이 공간의 대표인 안미향(여.32)씨를 찾았다. "정리가 안 돼 어지러우시죠?" 그러나 지난 일요일(21일)엔 더 발디딜 틈이 없었다고 손사래를 쳤다. 상시 활동자 15명에 소속된 동아리 회원만 50명이고, 연합 동아리 회원까지 합하면 1천명 가까운 청소년들이 오간다고 했다. 공간이 좁아 덩치 큰 동아리들은 대개 국채보상공원에서 모임을 갖지만 지난 일요일처럼 비라도 오면 사무실은 그야말로 미어터진다는 얘기였다.

학생들이 이곳을 즐겨 찾는 이유는 "눈높이를 맞춰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알듯말듯 이어지는 안씨의 이야기에는 지난 몇 년 동안의 고민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1996년에 우리세상을 만들 때만 해도 자신 있었습니다. 청소년들에게 건강한 가치관과 스스로 창조하는 문화를 심어주겠다는 의욕이 넘쳤죠".

고교 시절 동아리 활동을 통해 만난 30여명의 선후배들이 만든 우리세상은 곧바로 청소년 대상 사업을 펼쳤다. 열린 교실, 틈새 학교 등 지방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프로그램들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내 '슬럼프'에 빠지고 말았다. 규모도 좀체 커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참가를 이끌어 내기도 쉽지 않았던 것.

"청소년들이 너무나 달라져 있었던 거죠. 예를 들어 5.18이나 6.10 비디오를 틀어줘도 잠이나 자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충격이었죠. 대학 시절 그런 비디오를 보면서 사회와 철학의 문제를 고민하게 됐던 우리로선 황당할 밖에요. 이런 아이들과 무엇을 해야 하나 회의가 생길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내린 결론은 활동 방향을 교육 방식에서 문화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 기대치 역시 청소년들의 수준으로 낮추기로 했다. 옆에 있던 한민정(여.30)씨가 거들었다. "눈을 낮춰도 낮춰도 중고생들과 맞추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걸 맘껏 하는 걸 가장 즐거워하는 학생들에게 내용이나 의미 문제를 얘기하다간 이내 돌아서 버리거든요".

활동 방향이 바뀌자 청소년들의 반응이 달라졌다고 했다. "지난 여름 공연 때 청소년들 스스로 통일의 의미를 담는 걸 봤어요. 댄스나 수화 같은 형식에 그런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잘 해내더라고요. 보는 학생들의 반응도 괜찮았고요".

그렇게 만들어진 대표적인 형태가 동아리 연합이라고 했다. 작년 청소년 문화 한마당에 참가했던 팀들이 교류, 정보 공유 등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연합을 결성한 것. '우리세상'은 그들에게 만날 장소와 괜찮은 내용의 프로그램을 제공했을 뿐이라고 했다.

올해 청소년 문화 한마당 행사 준비를 청소년들에게 넘긴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스스로 만들어가면서 고민하고 내용을 담도록 하는 것이 이 행사를 진정한 청소년 축제로 발전시키는 방법이라 믿었다는 것. 당연히 올해 행사에는 작년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참가하고 관람하며 즐길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야기 끝머리에 이 낡은 건물로부터 곧 이사 갈 계획이란 이야기가 나왔다. 이때다 싶어 '우리세상'의 재정 문제를 물었더니 대답이 놀라웠다. 50명 가까운 후원회원들의 도움에 자잘한 수입을 보태기도 하지만 주 수입원은 '일'이라는 것이었다.

"15명 정도의 상시 활동 회원이 일년에 한번씩 돈을 벌러 나가요. 공장.식당.주유소.세차장 등 자신의 여건에 맞는 일터를 찾아 두달 쯤 일을 하는 거죠. 처음 문을 열 때부터 매년 해온 방법입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기가 어려운 건 아니지만, 타성에 젖지 않고 돈에 구속받지 않으며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몸을 던져 일한다는 '우리세상' 사람들. 이들이 만들어가는 행사가 상업성에 물들지 않고, 청소년들에게 점점 광범한 지지와 사랑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구나 싶었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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