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하는 오후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 '목마와 숙녀'

동년배 시인 김수영은 박인환의 포즈를 경멸했다고 한다. 삶의 진실이나 근본적 사유보다는 유행과 멋에 일관하는 그를 진정한 시인으로 생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시도 그런 혐의에서 벗어나기 힘든 시이다.

하지만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고 했지만, 가끔씩은 외롭고 또 그 외로움이 통속적이지 않을 때가 있다. 인생은 가끔 가을 바람 속에서 빈 술병을 세어가면서 한없이 대취하고 싶은 때가 있는 것이다. 김용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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