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테러와 고향

고향이라는 의미를 태어나서 자라난 곳이라고 규정 짓지 않고, 좀 더 넓은 의미로 그리움의 터, 혹은 인연 깊은 장소로 바꿔볼 수 있다면 대구도 나의 고향이다. 요염하게 채색되는 황홀한 팔공산 단풍이 아니라도 대구는 나를 끌어 들이는 인연의 줄을 내밀고 있었다. 우리는 일생을 통해 마음의 고향 몇 군데를 간직하며 살아 가는 것은 아닐까?

고향은 우리가 그곳을 떠나 있는 동안 그리움의 빛깔이 더욱 짙어져 가 남모르는 실연의 깊이 파인 상처인냥 우리를 지배한다. 특히 외국에 거주하는 해외 교포들에게는 고국 산천 모든 것도 고향이 된다. 제주도 한라산 중턱에서 바라보는 별똥별 흐름도, 혹은 강변 가로수 사이로 내 비치는 한강의 넘실대는 가로등 불빛도 모두가 고향이다. 고향은 미래를 향한 희망이고 좀더 보람찬 장래의 염원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제 백두산도 찾을 수 있고 경우에 따라 금강산도 갈 수 있게 되었다. 50여년 동안이나 서로 헤어졌던 가족들과 꿈에 그리던 상봉의 기쁨도 맞게 되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면' 하는 기대치를 가슴에 안고 우리들은 알찬 희망을 지녀 보기도 한다.

고국산천 모두가 고향

그러나 21세기에 또 다른 형태의 전쟁이 막을 열어 우리 모두는 답답함과 불안감을 가슴에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고국산천이 전쟁의 도가니 속에 휩쓸려 그리워도 그리워도 찾아갈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은 희망도 꿈도 차단된 처절한 현실에 처해 있다. 우리는 약소민족의 설움을 누구보다도 가장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 왔었다. 허나 비행기 테러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인 지난 8월31일~9월8일까지 남아프리카 더반에서는 반인종주의 국제회의가 열렸던 사실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붕괴돼 커다란 상실감으로 다가오기 전에 우리는 이미 이 회의의 진행과정에서 어떤 불길한 징조를 느껴야만 했다. 강대국에 밀려 식민지화 되었던 약소민족들이 차별 철폐를 목적으로 하는 더반회의에서 자리를 회피해버린 미국의 '퇴장극'에 대한 보도는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크게 다뤄지지 않았다.

매스미디어는 세상에서 벌어지려고 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잊어버리고 권력의 힘 앞에 눈치만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강대국과 돈의 힘에 밀려 매스미디어마저도 손을 댈 수 없는 곳까지 도달한 것일까. 그래서 뉴스는 우리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즐거움이 되지 못하고 뉴스가 없는 세상으로 숨고 싶은 충동마저 느끼게 된다.

황량해질수록 더 그리워

증오의 씨를 뿌리는, 가슴을 에이는 전쟁 뉴스가 아니더라도 텔레비전은 코미디 오락물을 제공하는 CM box화 되어가고, 젊은 아이들은 3S(screen, sex, sports)에 빠져 방황하고, 아버지라는 엄한 기둥을 상실한 가족은 제각기 따로따로 흩어져 밤거리를 헤매고, 상업요리가 둔갑하여 밥상에 오른다. 가정요리와 힘든 집안일에서 해방된 주부들은 여행업계의 높은 고객이 되어 온 세계를 누빈다. 주부들의 갖가지 반란이 진을 치는 세상에 흉악한 범죄가 도를 더해가는 뉴스를 피해 오늘도 매스미디어를 접하기가 두렵다. 세상은 아수라의 물결속에 어디로 흘러 가는지 도저히 예측할 수도 없다. 우리의 미래는 어디까지 전락할 것인가?

오늘도 뉴스에서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보고가 한참이다. 흙먼지 부푸는 산악지대에 푸른 섬광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고, 추위에 굶주리는 아프간 난민들의 초라한 영상이 전원 꺼진 텔레비전 화면에서도 계속 비춰진다. 물도 풀포기도 동물도 사라진 그들의 현실이 곧 지구의 미래가 될 듯한 숨막히는 아픔이 남몰래 가슴 깊숙이 밀려온다.

이런 와중에 오랜만에 친지들이 사는 대구를 찾았다. 그들에게서 따스한 우정을 나누어 받으며 왠지 가족같은 친근감을 갖게 되었다. 대구의 여러 음악인들과 인연의 끈을 맺게 되면서 대구는 나의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잡았다. 새 친구를 만나 구수한 된장찌개에 생선구이도 나눠 먹으며 속을 푸는 마음의 얘기를 나누었고 팔공산의 송이버섯 향기속에 다시 고향에 돌아 온 듯한 아늑한 기분을 맛 보았다. 대구, 황량해질수록 더 그리워지는 내 마음의 고향이다.

이승순(재일교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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