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드러나는 6·25 양민학살-(하) 국군·경찰의 '무법'

한국전이 일어나기 6개월 전이던 1949년 12월24일 정오. 24가구 127명이 사는 문경 산북면 석달마을에 무장군인 70여명이 들이닥쳤다.

1998년 공개된 미군 극동군사령부 비밀문서 '민간인 대학살'(문서번호 No 2686)에 따르면 이들은 국군 2사단 25연대 3대대 7중대 병력들. 군인들은 주민을 모이게 한 뒤 공산주의자들과 연관됐다며 추궁해도 부인하자 무차별 총격을 가해 주민들을 살해하고 확인 사살까지 했다. 이 사건으로 65세 이상 주민 13명, 15세 미만 어린이 26명, 여자 41명 등 86명이 죽었고 6가구에선 전가족이 몰살당했다.

형의 시신에 깔리는 바람에 살아 남았다는 채의진(67) 문경 피학살자 유족회장은 "피해는 그것만으로도 끝나지 않아 그 뒤에도 오히려 빨갱이로 몰려 40년이 넘도록 숨도 못쉬고 살았다"고 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이 돼서야 유족회를 만들고 처음으로 합동위령제나마 올릴 수 있었다는 것.

2000년 1월14일 매일신문 취재팀은 경산 평산2동의 폐쇄된 코발트 광산에서 100여구의 유골을 발견했다. 50년 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사건이 사실로 확인된 것.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9월 사이 이곳에서는 경산지역 보도연맹원과 대구형무소 일부 미결수 등 3천500여명이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학살됐던 것으로 추정됐다.

미국 AP통신은 2000년 4월 비밀 해제된 미국 국가 문서를 인용해 칠곡 지천면 덕천마을 등에서 좌익 정치범 2천여명이 재판없이 처형됐다고 보도했다. 배인수(86)씨는 "한국전쟁을 전후해 지천 신동재 정상 부근의 속칭 법전골에 나무 하러 갔다가 헌병 복장을 한 우리 군인이 미리 파둔 구덩이에서 민간인 6명을 사살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당시 매일신문 취재팀에 증언했었다.

경산 사건과 비슷한 때인 1950년 7월14일 쯤엔 군인들이 영덕지역 보도연맹 소속 주민 160여명을 영덕읍 화개리 매봉산 뫼골로 끌고 가 집단 처형했다. 군인들은 경찰과 함께 이들을 지서로 불러내 2~7일 동안 교육 시킨 뒤 영덕읍 남석리 곡물창고에 1, 2일간 감금시켰다가 현장으로 끌고 갔다. 이 사건으로 부친을 잃은 이상열(63·지품면)씨는 "보도연맹에 가입한 양민들은 지역에서는 지식층에 속했고 대부분이 강제로 가입됐다"고 말했다.

청도에서는 비슷한 사건으로 593명이 사망·실종된 것으로 조사됐다. 청도지역 민간인 피학살자 유족회 박희춘(69) 회장은 "1950년 7월 초 지역 보도연맹을 검속해 그 달 15~20일 사이 300~400명을 청도 곰티재와 경산 코발트광산 등으로 끌고 갔다"며, "전쟁 이전이던 1949년 8월14, 15일에도 청도읍 승학골(성하골) 밤티고개, 각북면 헐티재, 이서면 구리실 골짜기, 남성현, 풍각면 비티재 등에서 400~500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이 무렵 영양의 청기면 상청리, 수비면 창티산, 석보면 뒷재, 청기면 당리·사리 등 곳곳에서도 인민군 부역 등 죄목으로 민간인들이 총살됐다. 18명이 사살 당한 현장에서 부상 후 살아남은 곽효달(75·영양 대천리)씨는 "전날 폭격을 피해 다리 밑에 숨어 있다가 국군의 말을 듣고 나와 마을 앞에 모였더니 2명을 권총으로 사살하고 나머지를 마을앞 도랑으로 몰아 넣은 뒤 총을 쐈다"고 말했다.

김종환(76·상청리)씨는 "들에 나갔다가 야산으로 붙들려 가 '빨갱이를 대라' '인민군에게 어떤 정보를 줬나' 등의 질문과 함께 모진 고문을 당하다 소나무에 몸이 묶인 채 총에 맞았다"며, "함께 있던 다른 3명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그 뒤 추적 끝에 총을 쏜 경찰관이 누구인지 알아 냈다"고 말했다.

집단으로 총살 당한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경북 도내에만도 수십 곳에 이른다. 도의회 양민학살 진상규명 특별위원회가 접수받은 것만도 78건이나 되는 것. 이때 주장된 것은 다음과 같다. △문경읍 갈평리에서는 1949년 8월2일 게릴라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국군이 주민 38명을 붙잡아가 17명을 총살했고 △경주 내남동 노곡리 개무덤 부근에서도 한국전 당시 30여명이 총살됐다. △구미 선산읍 이문리에서는 피난 갔다가 너무 일찍 돌아왔다는 이유로 국군이 마을사람 20~30명을 총살했고 △청송 부남면 이현동에서는 1949년 사상문제로 마을사람 10여명이 처형됐다. △고령읍 장기리 어북실 강변과 운수면 화암리 금광부근 계곡에서는 남로당 가입 등을 이유로 70여명이 살해됐다.

사회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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