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경북 업그레이드 이것만은 버리고 가자-(8)공직 부패·무사안일

사업가인 ㄱ씨가 인허가 문제를 잘 봐달라며 친구인 공무원 ㄴ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ㄴ씨는 원칙을 지키자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들의 대화를 들어보자.

(ㄱ)거기 있으면서 그 정도 힘도 없어?/(ㄴ)응. 없어. 미안해./(ㄱ)알고보니 완전히 꽉 막혔네./(ㄴ)그래 공무원 제대로 하려다 보면 어쩔 수 없어./(ㄱ)세상이 다 그런데 왜 혼자만 잘난 척 해?/(ㄴ)세상이 다 그렇기는. 우리 사무실엔 그런 사람 한 명도 없어./(ㄱ)사람이 너무 융통성이 없으면 못써./(ㄴ)걱정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이러는게 나한테 편하고 맞는데./(ㄱ)세상은 혼자 사는게 아냐. 너도 언젠가 아쉬운 소리 할 때가 있을거야./(ㄴ)가난한 사람도 돕고 이웃돕기성금도 꼬박꼬박내. 사무실 동료나 상사들과도 잘 지내. 그러니 걱정마.

사람들은 원칙을 고수한 ㄴ씨에게 박수를 보낼까, 아니면 의리를 저버렸다고 비난을 퍼부을까.

앞서 대화는 부패방지위원회 책자에 소개된 '부패 피하는 방법' 중 하나. 그러나 솔직히 현실에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전국공무원노조가 지난해 9월말 전국 성인 남녀 1천명과 공무원 3천여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공직사회의 부정부패에 대해 국민의 88%가 '심각하다'고 답했고, 80%는 금품이나 향응제공이 업무처리에 '영향을 준다'고 답했다.

또 행정자치부 공무원직장협의회가 지난해 4급 이하 공무원 3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85%가 '공직사회에 부패가 존재한다'고 답했다.

한국행정연구원이 자영업자 및 기업체 500개 표본집단에 대해 조사한 결과 70%는 '부정부패가 심각하다'고 대답했다.

통계만 놓고보면 우리나라 공직사회는 구제불능일 정도로 썩었다.

그러나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청탁 한두번 받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앞서 '모범답안'처럼 매몰차게 친구의 당부를 거절했다가는 또래집단 나아가 지역사회에서 시쳇말로 '매장'될 수도 있는데, 과연 그런 부담을 과감히 떨쳐버릴 공무원은 얼마나 될까.

또 자녀가 둘만 돼도 한달 100만원이 넘는 사교육비가 들고 가족들과 마음먹고 외식 한번 하기도 빠듯한데, 식사접대나 선물, 그리고 가끔씩 들어오는 '촌지'를 초지일관 마다할 수 있을까.

대구 모구청 공무원은 "부서 회식을 가는데 혼자만 접대받기 싫다고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접대가 오가면 비교적 일처리가 원활하게 진행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누가 봐도 부당하거나 불가능한 일을 성사시키진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정권 교체기마다 '부정부패 척결'은 단골 메뉴였다.

대통령 집권 1년차 때 사정의 칼바람이 지나가면 줄줄이 징계가 이어졌다.

지난 93년 징계 공무원은 7천116명에 이르렀고, 98년엔 6천140명이나 됐다.

물론 1년차를 넘기고 나면 징계 공무원은 3천~5천명선으로 뚝 떨어진다.

'시범케이스'만 통과하면 한숨 돌리는 셈. 그렇다고 위험부담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정부패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여러 설문조사에 따르면 '관행'을 주범으로 꼽는다.

한국행정연구원 조사에서 민원인이 금품이나 접대를 하는 이유로는 '관행이기 때문'이 58%로 가장 많았고, '공무원의 간접적 암시'가 35.8%로 뒤를 이었다.

알아서 눈치보고 준다는 뜻. 반부패국민연대가 서울시 민원공무원 1천16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민원인의 78.5%가 업무 처리과정에서 상부 압력이나 외부 연고를 동원하는 것으로 나왔다.

또 42.3%는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민원인이 자진해서 뇌물을 준 적이 있다고 답했다.

부정부패를 바라보는 공직사회 내부의 묵인·동조에도 원인이 있지만 속된 말로 '알아서 기는' 민원인도 큰 문제라는 것.

경북도 공무원직장협의회 박윤용 회장은 "법 절차를 무시하려는 일부 민원인 때문에 행정절차가 강화되고, 이처럼 복잡해진 행정규제를 벗어나기 위해 다시 부정부패를 저지른다"며 "민원인 청탁을 받아 하위직에 압력을 행사하는 고위직과 부당한 명령을 과감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공직 분위기 속에 부패고리가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금품이나 접대를 한 경험이 있는 민원인 중 65% 가량은 불법행위 묵인이나 계약 수주 등 당면 이익보다 '원만한 관계 유지 및 신속한 업무처리'를 제공 이유로 꼽았다.

평소 정을 두텁게 나누다보면 언젠가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뜻.

그렇다면 이처럼 정내기를 좋아하는 지역민들의 공무원에 대한 평가는 어떠할까. 지난해 상반기 한국행정연구원은 흥미로운 자료를 내놨다.

'행정에 관한 공무원과 국민의 인식' 중 공무원 종합평가지수가 눈길을 끈다.

지역 구분없이 전반적으로 공무원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측면이 강했다.

호남지역의 평가지수에서 '낮다'는 응답률은 17.8%에 그친 데 비해 영남권의 '낮다'는 평가는 30.4%로 나타났다.

특히 대구는 41%, 경북 37%로 전국 최하위에 머물렀다.

대구 응답자 중 '높다'는 응답률은 3%에 불과했다.

국민고충처리위원회가 지난 94년 4월부터 재작년까지 시·도별로 내린 시정권고를 보면 경북이 110건으로 9개도 중 경기도에 이어 두번째로 많다.

또 2000년부터 지난해 상반기까지 내려진 시정권고에 대한 수용률을 보면 대구가 전남, 제주에 이어 세번째로 낮다.

중앙에 올라간 민원은 많고, 지역에선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같은 결과는 제목소리를 내기 힘든 공직사회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위계질서나 연공서열은 특히 대구·경북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광고 카피마냥 모든 사람이 '예스'라고 할 때 과감히 '노'라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직 덜 여물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잠자코 따르는 것이 편하고 눈 밖에 나지않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경북도 한 공무원은 "실컷 기안을 작성해 올리면 부서장이 수정을 요구한다"며 "잘못된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인사권자의 요구에 따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공무원은 인·허가 등과 관련된 모든 기안서류를 원안과 수정본, 그리고 수정 요구자의 직인 및 사유까지 포함해 보관토록 법제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안이 없을 경우 수정본의 오류가 감사에 적발되면 담당자가 고스란히 책임을 뒤집어 써야 하기 때문이다.

경북대 행정학과 김석태 교수는 "단체장의 의지와 과거 경력에 따라 공직사회 분위기가 좌우된다"며 "민선 이후 지역민에게 비전을 제시하려는 의지는 강해졌지만 아래쪽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반영하는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공직사회가 예전에 비해 훨씬 능동적으로 바뀌고 있다"며 "공무원 개개인의 경쟁력도 10여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장된 만큼 단체장이 강력한 의지를 갖고 공직사회 분위기를 역동적으로 이끈다면 지역발전의 리딩그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성서첨단산업단지 입주업체인 메트로닉스 김병균 사장은 "현장을 발로 뛰며 기업체의 어려움을 직접 듣는 공무원이 많아졌다"며 "전문 분야에서 공무원이 주도적으로 못 나서는 것은 아쉽지만 업계 의견을 수용하는 분위기는 확산됐다"고 평했다.

공직사회는 변하고 있다.

거대한 몸집 탓에 느리기는 하지만 과거에 비춰 격세지감을 느낀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경북도 류성엽 감사관은 "예전보다 부정부패를 보는 잣대가 훨씬 강화됐다"고 말했다.

기업인들과 식사를 하고 명절에 상품권 받는 것이나, 공직사회 내부에서 전별금 또는 여행경비를 갹출하는 관행에 대해서도 엄격한 기준으로 평가한다는 것. 류 감사관은 "일하는 공무원이 대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며 "공직 내부의 자정 노력과 함께 공무원들을 견제하고 또 격려하는 지역민들의 노력이 뒷받침된다면 지역 공직사회도 경쟁력을 갖출 것"이라고 말했다.

김수용기자 ks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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