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의 충신이자 대학자, 우리 역사에서 충절과 효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선생.
영천 임고면 선원(仙源)마을은 포은선생의 방계 후손인 영일(迎日) 정(鄭)씨들이 수백년동안 세거해 오는 마을이다.
명산 운주산과 기룡산이 마을의 좌.우와 배후 전체를 감싸안고, 맑은 자호천 물이 마을 앞을 흘러내리는 수려한 풍광. 영천의 3대 길지로도 꼽히는 선원마을은 조선조 인조때 해남 현감을 지낸 정호례(鄭好澧.1604~1672)가 이곳을 도연명의 무릉도원에 비유, 선원이라 부르며 정착한데서 유래됐다.
선원마을은 포은선생의 출생지인 임고면 우항리와 임고서원(臨皐書院.포은을 기리기위해 조선 명종 8년(1553)에 창건)에 바로 이웃해 자리잡고 있다.
마을 곳곳에는 함계정사(涵溪精舍) 환구세덕사(環丘世德祠) 경괴재(景槐齋) 동연정(東淵亭) 송원재(松源齋) 학파정(鶴坡亭) 환고정사(環皐精舍) 등 수백년의 내력을 간직한 문화재, 연정고택(蓮亭古宅) 등 고색창연한 기와집들이 긴 세월의 풍상을 이겨내면서 반촌(班村)의 전통과 긍지를 묵묵하게 말해주고 있다.
특히 환구세덕사와 충효각은 선원마을의 충효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중 환구세덕사는 임진왜란때 왜구를 무찌르고 영천성을 복성한 의병장 호수공 정세아(鄭世雅.1535~1612)장군과 아들인 백암(栢巖) 정의번(鄭宜藩.1560~1592)장군 부자의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사묘(祠廟)와 강학(講學)공간이 함께 하는 서원이다.
환구세덕사옆의 충효각(忠孝閣)은 임란때 경주 전투에서 적군에 포위된 아버지 정세아 장군을 구출시키고 대신 전사한 정의번 장군을 기리기 위해 1784년 건립됐다.
정세아.의번 부자는 선원마을 입향조인 정호례의 조부와 부친으로서 이들의 충효정신은 지금도 선원마을의 맥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선원마을의 입향조는 정호례이지만 터전을 닦고 후손들을 융성케 해 선원마을에 뿌리를 내리게 한 인물은 정호례의 손자 함계(涵溪) 정석달(鄭碩達.1660~1720)이다.
일생동안 학문을 탐구하며 인품과 덕망이 높았던 정석달은 1702년 함계정사(涵溪精舍)를 짓기 시작했으나 완공을 보지못해 사후에 손자인 정일찬(鄭一鑽.1724~1797)이 완공했다.
마을중간 언덕 위에 위치한 함계정사는 품위있으면서도 소박하다.
옛날에는 정사 앞에 깊고 맑은 자호천 물이 이곳을 감돌아 계심대(戒心臺)를 거쳐 흘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자호천 물이 흐르던 곳은 과수원이 돼있고 함계선생이 살았던 집과 계심대 큰바위도 흔적이 없어 세월의 무상함만 느끼게 한다.
계정사는 중앙 대청마루 좌우에 온돌방 2개 구조로서 거처하는 곳과 서책을 간수하고 손님과 벗을 영접하는 곳으로 용도를 분담했다.
이같은 연유로 마을사람들은 마을내 수많은 누각.서원.정자.전통가옥들이 있지만 함계정사를 이 마을의 상징적 건물로 꼽고 있다.
이른 봄비를 맞으며 마을 정재용(62)씨 집을 찾았더니 반갑게 맞이하면서 선원마을 사람들이 손님이 오면 즐겨 내놓는 것이라며 유과를 대접했다.
선원마을은 행정구역상 선원1리와 선원2리로 나누어지며 1.2리 합해 현재 150여 가구에 300 여명. 번창했던 60년 이전 750여 가구의 5분의 1이 채 안될만큼 줄었다.
마을 이장 정희웅(62)씨는 "정씨가 100여 가구, 타성이 50여 가구지만 타성 주민들은 대개 20~30년전 이사해와 주로 마을 외곽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 이장은 "마을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 올해 50세일 정도로 젊은이들은 모두 대처로 나가고 남은 사람은 늙은 내외들뿐"이라면서 "노령화와 인구감소로 집성촌이 점차 해체돼 가는 것이 시대적인 추세인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마을의 각종 대.소사를 챙기는 마을 일꾼 정재용씨는 "설날부터 정월대보름까지 수백명이 어울려 즐기던 영천의 전통민속놀이인 곳나무싸움놀이도 1960년을 마지막으로 마을에서 명맥이 끊겼다"고 아쉬워했다.
우리사회가 개발시대로 들어가기 전인 70년대 이전만 해도 비옥하고 너른 농토에 과수농사, 쌀농사로 영천에서 부농마을로 손꼽혔던 선원마을은 씨족들이 서로 단합해 화목하고 윤택하게 살아 타지역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 선원마을도 다른 마을처럼 쇠잔해져 적막강산으로 변해가고 있다.
마을주민 정용기(63)씨는 "자식들이 나중에 마을에 돌아와도 큰일, 안와도 큰일이라는 것이 이곳서 살고있는 우리 부모들의 솔직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자식들이 젊어 떠났다가 마을로 되돌아올 때는 필시 사회생활에 실패했기 때문에 걱정이고, 마을에 오지않으면 장차 마을전체가 사라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또 걱정이라는 것.
"종가집 종손들마저 다 외지로 떠나고 없습니다.
늙은이들만 지키는 마을, 20~30년후면 마을이 존속할는 지도 걱정됩니다.
그러나 수백년 이어온 우리마을을 후손들이 반드시 지키고 유지해 나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마을주민들의 희망섞인 바람이다.
민 정연팔(69)씨는 "영남 사림이 벼슬길이 막힌 이후 우리 조상들은 양반이라는 자존심을 지키면서 예의범절을 중시했지요. 선원마을에는 아무리 어려워도 손님이 오면 환대하는 전통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습니다"고 자부했다.
비록 갈수록 쇠퇴해 가고 있기는 하지만 곳곳에 산재한 문화유물, 유물속에 깃든 충효의 정신, 이같은 정신을 조상대대로 실천해온 긍지와 자부심이 선원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지금까지도 면면히 흘러오는 것 같다.
서종일기자 jise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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