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하는 오후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 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 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정일근 '어머니의 그륵' 부분

만국어인 에스페란토나 어떠한 외국어로도 우리의 피와 살인 '엄마'라는 말을 대치시킬 수 없다.

사투리 '그륵'이라는 말도 우리의 산하와 체온에 깊이 녹아 숨쉬는 질그릇이다.

그것은 사전으로 다듬어진 인공조미료가 아니다.

이 시인은 아주 낮은 데까지 내려가 버려져 가는 하찮은 사투리에 맥박을 주어 인간본연의 순수한 빛깔로 되살리고 있다.

권기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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