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말밥'

한반도의 오랜 분단으로 남북 간에는 언어가 크게 달라졌다.

남한은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한글의 외래문화 오염이 심화됐다.

북한은 '주체사고'가 언어의 순수성을 지키는데 도움을 준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정치용어, 군사용어의 일상 침투로 언어가 살벌해진 느낌이 없지 않다.

현재 북한에서는 김일성 어록과 평양 말을 토대로 소위 '문화어'를 사용하고 있다.

문화어 표기원칙 중 하나는 "한자어와 외래어는 한글고유어로 대체하고, 고유어가 없을 때는 뜻을 풀어 쓴다"로 돼 있다.

▲한자어를 고유어로 대체한다는 북한의 표기원칙은 평가해 줄만한 부분이다.

토속성·향토성을 잘 살려내고 있다.

도화선→불심지, 미소→볼웃음, 구설수→말밥 등은 한자어의 의미를 옮겨온 것들이다.

그러면서도 우리 정서와 맞아떨어진다.

장모→가시어머니, 수화→손가락말, 월식→달가림도 같은 부류의 말이다.

-매, -새와 같은 접미어도 우리보다 널리 쓰고 있다.

가사(家事)→집안 거두매, 방청소→방거두매, 각선미→다리매, 구성→엮음새 등이 그것이다.

▲교육부장관에 이어 중앙박물관장 후보로 올랐던 어떤 문화계 인사가 인터넷의 독설과 난설에 휘말려 스스로를 자살(?)케 했다고 한다.

당사자의 적격여부를 떠나 '말밥(구설수)' 때문에 경륜 있는 인재들이 중도하차 하게된 사실이 우리를 우울하고 부끄럽게 만든다.

얼마 전 유명 문인의 '홍위병' 발언도 그 연장선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새 정부가 토론공화국을 공언했지만, 우리의 현실은 묵언(默言)공화국 수준이다.

생산적 대화보다는 욕설, 모욕 등 인신공격으로 '상대 죽이기'를 하는 게 대화의 목적이 되는 예가 없지않다.

입만 떼면 '저질' '날조' '반동' '위선' 등 살벌한 단어들이 터져 나온다.

▲최근 미국 영어교육 현장을 접해본 지역의 한 영문과 교수는 "우리 영어교육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는 소감을 보내왔다.

한국 영어교육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어휘교육이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 초등학교 4, 5학년이 되면 활동적 어휘 수가 1만5천 개 정도 된다고 한다.

한국 영문과 대학원생들의 것을 능가하는 숫자다.

일반화에 무리가 없지 않겠지만, 이런 단어(국어)실력으로 토론을 하게되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게 될 가능성이 높다.

구사할 줄 아는 단어가 상대방을 부정하고, 전투적이며, 공격적인 용어뿐이라면 토론이 독설, 난언에 그치게 된다.

입을 작죄구(作罪口) 즉, 죄를 짓는 구멍이라고 한다.

북한의 예쁜 단어들을 빌려서라도 우리의 언어교육 부실을 메워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묵언패(默言牌: 말을 금하는 불교의 수행방법)를 차고 다녀야할 세태다.

박진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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