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동안 일어난 세상의 변화 가운데 첫손으로 꼽히는 건 아마 인터넷일 것이다.
변화에 둔감하지만 학교 역시 정보화의 물결 속에 놓여있는 상황이라 학교마다 학급마다 집칸(홈페이지)씩은 마련해두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운영자의 일방적인 정보제공 수준에 머물거나 만들 때 마음 뿐, 금새 폐허가 되버리는 게 현실이다.
괜찮은 홈페이지가 없나 검색엔진을 두드리다가 특이한 학급 홈페이지를 만났다.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 지난 14일 학교를 찾았다.
◇촌(?)스럽지만 풍요로운 홈페이지
'푸른 꿈, 푸른 마음, 푸른 교실-최제일의 홈페이지입니다'(cji5611.com.ne.kr)를 열었을 때 첫 느낌은 촌스럽다는 것이었다.
깔끔한 디자인에 잘 정리된 메뉴, 보기 좋은 서체 등 요즘 잘나가는 홈페이지의 그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홈페이지는 원클릭으로 다른 발을 돌리기 십상이지만, 혹시나 하며 메뉴바를 눌렀다.
그런데 눌러가면 눌러갈수록 손을 뗄 수 없었다.
1999년부터 올해까지 5년째. 포항 대도초등학교와 두호남부초등학교로 이어지는 5개 학급의 역사가 온전히 녹아 있었다.
여러 학급 홈페이지 공모전 입상작들이 주는 일회성의 깔끔함 뒤편으로 남았던 아쉬움을 단번에 채워주는 것이었다.
꽃잎이슬가족-한마음가족-웃음꽃가족-초록나라가족-별빛가족으로 계속돼온 최 교사의 학급 홈페이지에 담긴 또다른 볼거리는 주위에서 찾아보기 쉽잖은 내용의 성실함. 학급문집과 학급앨범, 학급일기 속에는 학급 학생 하나하나의 정성스런 글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매달 내는 학급신문, 행사 때마다 찍은 사진들, 이처럼 5년을 한결같이 홈페이지를 꾸려온 성실함은 디자인이나 메뉴의 촌스러움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다.
올해 두호남부초교 3학년3반 별빛가족 홈페이지에도 벌써 최 교사가 직접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학생들의 사진과 10여일어치의 학급일기가 올라와 있다.
◇홈페이지를 닮은 선생님
교실에서 만난 첫 느낌은 교사라기보다 땅에 뿌리내린 농부나 편안한 이웃집 아저씨를 닮았다는 것이었다.
수업이 끝날 시간이라 교실은 왁지지껄, 까르르 웃음소리가 곳곳에서 터졌지만 인자한 웃음만 가득했다.
"한번씩 무섭게 화도 냅니다.
하지만 아직 저학년이라" 넉넉한 미소가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올해 마흔여섯살이죠. 홈페이지 운영한다고 하니 좀 어색한가요?" 40대 중반이면 요즘 학교에서는 어중간한 연배다.
혈기왕성하고 의욕 넘치는 젊은 교사들과 교장, 교감 사이에서 새우등처럼 굽어버리기 쉬운 때. 컴퓨터나 인터넷이라면 젊은이들에게 떠넘기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도 그는 정보부장을 맡고 있다고 했다.
"15년 전 영덕서 근무할 때 젊다고 맡은 게 PC로 업무용 문서 처리하는 일이었지요. 그렇게 인연을 맺고 나니 나도 모르게 재미가 붙어서 지금까지 컴퓨터와 관련된 연수란 연수는 다 받았습니다".
학교에 컴퓨터가 들어오고 인터넷이 깔리게 되니 자연스레 학급 홈페이지를 만들게 됐다.
처음엔 자기 글을 인터넷에서 볼 수 있게 해 주면 좋아할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학급 운영과 연결시켜 나가니 효과가 이만저만이 아니더라는 것이었다.
게임이나 채팅만 즐기던 학생들이 일기나 글쓰기에도 재미를 붙이게 되고 솜씨도 점점 좋아졌다.
고학년을 맡을 때는 대화방을 이용해 토론도 여러차례 했다.
주제글 쓰기, 돌아가며 학급 일기 쓰기, 학급기자 운영 등 학급 활동도 활발해졌다.
지난해 맡았던 6학년생들 가운데 20여명이 자기 홈페이지를 만들기도 했다.
◇언제나 처음 마음으로
"별빛가족이란 이름은 제가 지었어요. 언제나 별처럼 초롱초롱하라고. 우리 학교에 이런 홈페이지도 있었나 싶었는데, 우리가 잘 만들어갈 거예요". 박소희양은 처음 생긴 홈페이지라며 연신 즐거워했다.
최 교사의 마음도 처음 같았다.
"다른 선생님들 홈페이지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는데 광주의 한 선생님 홈페이지가 특히 기억납니다.
'언제나 처음처럼'이란 이름이죠. 교사가 처음 됐던, 컴퓨터를 처음 배웠던 그때를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트북만 3대째 구입했다는 그는 지난해 디지털 카메라를 배웠다.
스캔해서 올리는 것보다 훨씬 간편하니 학생들의 사진도 더 많이 찍을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맡았던 6학년생들이 졸업할 때는 학급 홈페이지 내용들을 직접 CD를 만들어줬다.
올해는 멀티미디어 저작도구들을 더 배우고 동영상 편집도 시작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 흔한 공모전이나 연구 발표 등에는 한번도 내보지 않았다고 했다.
"학생들과 쉽게 대화하고 더 즐겁게 지내는 게 컴퓨터를 활용하는 목적입니다.
교사가 그거 하나면 충분한 거 아닙니까". 그는 1, 2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효율 없는 업무나 연구 등에 매달리게 만드는 교사 승진제도의 문제점을 꼬집으며 평교사에 대한 처우를 더 높여 승진의 필요성을 낮추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요즘 유행하는 ICT 활용교육에도 남못지않게 열심이지만 그는 수업의 20~30%선을 넘기지 않는다.
자칫 식상해지기 쉬울 뿐만 아니라 교사들이 직접 해 주는 설명과 몸짓이 어린이들에게는 더 효과적이라는 것. "학생들 스스로 체험할 수 있는 교육이 최고입니다.
컴퓨터에 의존하다 보면 그 자체가 짐이 되기도 합니다.
분필 한 자루 들고 처음 수업할 때 마음이면 못할 게 없죠".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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