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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칼럼-아마추어 시대는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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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선가 시의 아마추어는 시에 대한 자의식이 약하거나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쓴 일이 있다.

현대는 모든 분야가 프로의 시대다.

그러니까 그 각 분야에 대한 자의식이 없이는 용납되기 어렵다.

시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당연하다.

나는 차 운전을 할 줄 모른다.

남의 차를 얻어 타는 일이 간혹 있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은 차를 가진 사람은 차에 대한 의식을 가져야 하겠구나 하는 점이다.

차가 길을 가다가 (거기가 산간오지라고 생각해 보라) 만약 고장이라도 난다면 어쩔 것인가? 간단한 고장은 차주인(운전자)이 손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는 길에 대해서도 프로다.

어떻게 그렇게도 길에 대해서 세세하게 알고있는지? 서울과 같은 복잡 미묘하게 얽히고 설킨 길들을 어찌 그렇게도 잘도 헤치며 목적지를 용케 찾아가는지? 특히 밤길을 말이다.

길눈이 어둔 나는 신기하게만 보게 된다.

나는 혼자서는 도저히 서울거리를 헤쳐나갈 수가 없다.

고소공포증과 함께 교통공포증에 걸려있다.

이런 나를 보고 친구 한 사람은 자넨 가장 현대인일세 하고 농을 걸기도 했다.

나는 이처럼 이 방면의 아마추어다.

요즘 어린애들도 만진다는 인터넷은 또 어떤가? 나는 완전히 제쳐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고독감을 절실히 느끼지도 못 한다.

나는 몹시도 둔감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세계는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듯이 보인다.

아직은 이만한 여유라도 가지고 있지만 얼마 안 가서 이만한 여유마저 완전히 다 빼앗기고 나는 철저히 버려진 존재가 되어 어디에도 끼지 못 하는 처지가 될는지도 모른다.

나는 완전히 현대사회에서의 아마추어다.

아무데도 쓸모없는 아마추어가 되어가고 있다.

현대는 각분야에서 프로들이 제 몫을 하는 그런 시대다.

옛날에는 물론 그렇지가 않았다.

문학만 하더라도 그 방면의 전문가가 따로 있지 않았다.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쓴 윤선도(尹善道)나 '사시남정기(謝氏南征記)'를 쓴 김만중(金萬重)을 우리는 프로라고 하지 않는다.

그 무렵에는 누구나 선비면 할 수 있었던 파한(破閑)거리로 쓴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보아 다른 선비들이 남긴 시가들이나 소설류들과 별로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다.

시나 소설에 대한 특별한 의식이 그들에게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다.

덧붙여서 한마디 더 한다면, 보들레르는 괴테를 아마추어라고 했다.

그런데 지내놓고 보니 보들레르도 현대적인 차원에서는 아마추어가 되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TS 엘리어트나 쉬드 리얼리스트들에 비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다.

TS 엘리어트나 쉬드 리얼리스트들이 보들레르에 비하면 누구의 눈에도 훨씬 현대적으로 비치리라. 그리고 그들은 보들레르보다는 훨씬 더 정교한 시에 대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문단, 특히 우리 시단이 아마추어리즘의 꼬리를 끊지 못 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시에 대한 자의식이 옅다는 증거가 되리라. 후진성을 말함이다.

물론 이 후진성은 시에 대한 의식의 후진성이다.

시에 대한 너무나 소박한 의식이 우리시단에서는 아직도 거침없이 나돌고 있다.

아마추어리즘이 사태를 이끌어가던 시절이 편안한 시절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사람들은 긴장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그래서 농경시대에는 김소월과 같은 시인이 나오고 그의 시가 환영을 받는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절(고도정보화시대)에서도 생각해볼 문제다.

적어도 시단에서만은 그런 풍조가 청산되어야 시대에 대한 체면이 선다.

우리가 아마추어리즘이 사태를 이끌어가던 시절을 간혹 그리워하게 되는 것은 그때가 사람을 훨씬 편안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프로의 시대는 어딘가 사회가 각박해지기도 한다.

여유가 없어 보인다.

여유를 빼앗기고 사람들은 오히려 멍해지기도 한다.

지나친 긴장이 사람을 그런 상태로 이끌어간다.

모든 면에서 물론 대전환이 있어야 한다.

문화의 새로운 계절이 다가와야 한다.

그러나 옛날로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게도 되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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