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레저&여가-거창 미녀봉

여인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반듯이 누워 있다

봉긋한 가슴을 드러낸 채. 이마도 넓고 콧날이 오똑한 게 상당한 미인인 듯하다.

누구를 부르는지 입도 크게 벌리고 있다.

대구에서 88고속도로를 타고 광주 방면으로 달리다보면 거창휴게소 부근에서부터 왼쪽으로 눈에 들어오는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의 미녀봉(930m)은 그렇게 사람을 유혹한다.

멀리 있는 사람을 '요염한 자세'로 불러들인 이 산은 그러나 가까이 가면 짐짓 딴청을 부린다.

'언제 내가 오라고 했느냐'는 듯 몸을 내주기를 강하게 거부한다.

요즘 같은 여름날엔, 태양이 구름에 가려 힘을 잃었더라도 팥죽같은 땀을 최소한 한 되 정도는 흘린 이에게만 정상 정복을 허락한다.

산행 들머리인 가조면 기리 음기마을 위쪽 저수지 바로 위는 명당인 모양이다.

가족묘지라도 되는 양 그리 넓지 않은 면적에 제법 많은 '사자(死者)의 집'이 들어서 있다.

이곳을 지나면 햇볕이 머리에 직접 닿는 일은 거의 없다.

위쪽에만 푸른 잎을 달고 있어 볼품은 별로이지만 키 큰 소나무가 빽빽하다.

등산로는 그 밑으로 나 있다.

최근 내린 비 탓인지 등산로 옆 좁은 계곡에는 물이 세차게 흐른다.

---경사 가파르고 암벽 많아

20여분 걸었을까. 커다란 부우춤나무(참나무의 일종)가 앞을 가로막는다.

둥치 둘레가 두 아름은 족히 된다.

거창군청 홈페이지 산행 안내도엔 '닥산나무'라고 표기돼 있다.

'닥산'은 토지나 마을의 수호신이 있다는 산이나 언덕을 뜻하는 '당산(堂山)'의 오기인 듯하지만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다.

농공단지에서 난 길을 산행 들머리로 잡아도 이 나무를 거치게 된다.

흐르는 물소리라도 없으면 질식할 것 같은 길을 조금 더 오르면 갈림길에 작은 샘이 있다.

유방샘이다.

샘이라고 하지만 물이 땅 속에서 솟는 곳이 아니다.

바위 밑을 흐르던 물이 지표면으로 노출되는 지점일 뿐이다.

특별한 시설은 없고 푸른 플라스틱 바가지 2개만 달랑 놓여 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우나 충분히 입을 적시고 물통도 채우는 것이 좋다.

물을 구경할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기 때문이다.

왼쪽으로 가면 미녀봉, 오른쪽으로 오르면 유방봉이라는 이정표가 있다.

어느 길을 택할까 고민하다 정상에 빨리 오르고 싶은 마음에 미녀봉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경사는 지금까지 왔던 것보다 훨씬 가파르다.

소나무 많은 곳에서는 당연히 송이버섯이 나는 모양. 바위 곳곳에 '송이 입찰지'라며 입산금지를 알리는 붉은 글씨가 씌어 있다.

가을에 찾으면 운 좋은 사람은 남성의 양물 비슷하게 생긴 송이버섯 한 뿌리쯤은 등산로에서도 얻어걸릴 수 있을 것 같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눈은 아리고 다리는 아프지만 하얗고 노랗고 빨간 들꽃에 반해, 이름 모를 산새의 울음소리에 취해 40여분 걷다 보면 미녀봉 정상. 정상이라고는 하지만 소나무에 둘러싸여 전망이 시원찮다.

작은 돌탑이 정상 표지석을 대신하고 있다.

---비계산·오도산 한눈에

올라온 길을 제외하고 길은 두 개인데 안내 이정표가 없어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헷갈린다.

미녀봉 산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코스인 유방봉을 가려면 소나무 사이로 난, 진행 방향 오른쪽의 작은 오솔길을 택해야 한다.

리본이 많이 달린 능선길은 바로 수포대로 이어진다.

야유회 장소로 안성맞춤일 것 같은 헬기장을 지나 30여분 더 내려오면 유방봉. 능선 바로 앞쪽에 있는, 마치 여인의 젖꼭지처럼 생긴 바위는 왜 이곳이 유방봉으로 이름지어졌는지를 조용히 말해 준다.

완전히 바위로 이루어진 유방봉에 올라서면 그동안 막혔던 시야가 확 트인다.

넓은 가조 들판이 눈 아래에 펼쳐지고 호남과 영남을 잇는 88고속도로가 하나의 실선으로 눈에 들어온다.

동북쪽으로는 비계산 능선이, 동남쪽으로는 오도산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여인의 가슴에서 턱, 코, 눈썹 이마로 이어지는 하산길 대부분은 경사 심한 암릉이다.

바위 틈새로 난 길을 몸을 모로 세워 지나야 하고, 두 손으로 바위나 나무에 매달리다시피 해야 하는 곳도 한 두 곳이 아니다.

'다리가 짧은 것'이 원망스런 곳도 수두룩하다.

수직에 가까운 암벽이 가로막기도 하지만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밧줄이 매어져 있고, 정 자신이 없으면 돌아가면 된다.

멀리서 보면 윤곽이 뚜렷해도 그 위를 걷고 있으면 어디가 어딘지 구분 안되고, 아찔함도 느낄 수 있는 미녀봉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여인 가슴·턱·코 등 뚜렷

하나는 옛날 바다였던 이곳에서 한 장군이 탄 나룻배가 표류하자 옥황상제가 딸을 내려보내 구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 딸이 장군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이에 노한 옥황상제가 딸과 장군을 모두 산으로 만들어 버렸는데, 옥황상제의 딸이 변한 산이 미녀봉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병을 고치려고 약초를 캐러 산에 올랐던 처녀가 뱀에 물려 죽자 이를 가련히 여긴 산신령이 죽은 처녀의 모습대로 미녀봉을 빚었다는 것이다.

험준한 암릉이 끝나고 물소리가 다시 귀에 들어오면 산행은 대충 끝난다.

하지만 경사가 급하기 때문에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발끝에 온 신경을 집중시켜야 한다.

송이밭을 지키는 임무를 띤 듯한 검은 개 두 마리가 어디선가 나타나 컹컹 짖는다.

딴 생각 하지말고 하산하라는 것이다.

혹시나 달려들까 싶어 발길을 재촉하다보니 어느새 유방샘이다.

쉬엄쉬엄 걸어도 4시간이면 산행 가능하다.

▲가는 길:88고속도로 가조IC에서 빠지자마자 농공단지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농공단지를 지나면 도로 왼쪽으로 보이는 교회(기리교회)가 보이는데 이 교회 조금 못미처 있는 마을(음기마을) 가운데로 난 소로를 따라 올라간다.

시멘트 포장이 끝나는 작은 저수지 부근에 차를 세우고 산행을 하면 된다.

농공단지에서도 산행이 가능하지만 입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주변 가볼 만한 곳: 전국 제일의 강알칼리성 온천으로 피로회복·신경통·류머티즘·알레르기성 피부염·만성습진 등에 효과가 있다는 가조온천과, 태조 이성계가 고려 왕족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궐에서 사용하는 향을 내려 제를 지내게 했다는 고견사가 인근에 있다.

▲먹을 만한 집:가조면사무소 소재지의 대명식당(055-942-1005)에서는 국산 미꾸라지만을 이용한 추어탕(4천원)과, 재래식 방법으로 요리한 어탕국수(5천원)를 주메뉴로 하고 있으며, 울산식육식당(055-943-9571)에서는 얼리지 않은 소·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다.

소 등심·갈비살 1인분 1만3천원, 돼지고기 삼겹살 1인분 4천원.

글·사진 송회선기자 so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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