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가을운동회

가을은 초등학교 운동회의 계절이다.

학부모 세대들에게 '운동회'는 아스라한 한 편의 추억으로 남아 있게 마련이다.

만국기 아래서 '탕' 소리에 화약 냄새가 피어오르면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참으며 달리던 때, 아버지는 이웃마을과 줄다리기 대항전에 나서고, 소쿠리 상품을 욕심낸 할머니가 꾸부정한 허리로 운동장을 헤매도 마냥 즐겁기만 했던 추억.

그러나 현실의 운동회는 추억보다 답답함을 안겨준다.

준비에서부터 끝날 때까지 20년, 30년 전이나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 방식, 그렇고 그런 프로그램. 디지털 세대들에겐 고리타분한 학교에서 치르는 억지 행사로 비치기 십상이다.

여기에 학교발전기금이다 연습하는 학생들 음료수값이다 해서 내야 하는 찬조금까지 겹치면 학부모들에게도 부담스런 통과의례로 여겨질 뿐이다.

이런 상황을 진행해야 하는 교사들의 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며칠 전 열린 운동회가 열린 대구의 초등학교 두 곳에선 이런 모습들이 여지없이 비치고 있었다.

#단체 공연-개학과 함께, 수업도 않고

한 학교 운동회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한 건 1학년생들의 꼭두각시 공연이었다.

부모들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덩실 어깨춤을 췄다.

연지.곤지 찍고, 치마저고리에 족두리까지 쓴 어린이들의 모습은 더없이 귀여웠다.

공연이 끝나자 어린이들은 엄마를 찾아 달려갔다.

땡볕 아래 빨갛게 익은 얼굴들은 물을 찾기 바빴다.

한 어머니는 "10분도 안 되는 공연 하려고 개학 후부터 매일 두세시간씩 애들을 고생시켜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1학년짜리들을 이만큼이라도 시키기 위해 선생님들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했다.

운동회의 단체 공연은 볼거리가 많지 않았던 과거에나 통하던 것이다.

마음껏 뛰어다니기 좋아하는 어린이들에게 줄을 꼭 맞추게 하고,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게 만드는 군대식 공연은 사라져야 할 일이다.

인내와 고통을 요구할 만큼의 교육적 효과가 있을까. 한 교사는 "운동회를 통해 학부모와 지역 인사들에게 학교의 교육 성과를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기-해마다 꼭같은, 선생님들이 만드는

운동장 이곳저곳에서 여러 종목의 경기가 열렸다.

첫 운동회를 맞는 1학년생들의 60m 달리기. 뛰는 방법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듯 삐뚤삐뚤 넘어질 듯 달려가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엄마들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다른 쪽에선 5학년 남학생들의 장애물 달리기 경기가 펼쳐졌다.

숨이 목구멍까지 차도록 달리지만 시상 등수에 들지 못하면 억울함과 씁쓸함만 남을 뿐. 등수에 들어 깃발 아래 모인 아이들은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다.

한 4학년 어린이는 "작년과 달라진 게 별로 없어서 재미가 없다"며 "빨리 끝나고 게임이나 하러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개인전이든 단체전이든 운동회의 각종 경기종목은 학교마다 크게 다르지 않다.

교사 중심으로 기획돼 예전부터 해오던 것들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교육 당국은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라고 떠들어대지만 현장에선 먹혀들지 않는 좋은 사례가 바로 운동회다.

어린이들은 물론 학부모들까지 참가해 계획과 진행, 평가까지 하는 운동회는 안 될까. 어린이들이 즐거워하는 종목으로 구성하면 안 될까. 친구들과 사생결단 경쟁하는 내용이 아니라 함께 힘을 모으는 과정 속에서 공동체의 소중함을 깨닫는 계기로 만드는 운동회는 안 되는 것일까.

#점심시간-아수라장에, 아빠는 없고

한참 땀을 흘리고 난 뒤에 맞는 점심시간은 운동회의 백미. 엄마가 싸온 보따리에서 음식들이 풀어지자 아이들의 입은 금세 볼록해진다.

음료수를 권하는 엄마의 표정엔 대견함이 비치지만 짜증도 묻어났다.

땡볕 아래 앉을 만한 곳이 많지 않은 학교. 나무 아래, 건물 사이, 복도에까지 그늘이 있는 곳을 찾아 엉덩이가 닿을 정도로 비집고 앉아서 먹는 밥이란. 아이들이 뛰고 어른들이 오가느라 먼지까지 풀썩거리는데. 한 어머니는 "교실이나 식당을 개방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 청소를 이유로 땅바닥에 비좁게 앉아 먹는 걸 당연스레 지켜보는 학교 관계자들의 권위의식은 언제 고쳐질까"라며 혀를 찼다.

분식점에서 산 김밥과 교문 앞에서 파는 통닭을 들고 허겁지겁 달려오는 어머니가 보였다.

교실 앞에서 기다리던 아이를 만난 뒤에야 숨을 돌린 그는 "맞벌이 부부인데 월차를 낼 형편도 아니라서 점심시간에 맞추느라 애를 먹었다"며 "맞벌이 부부 비율이 만만찮은데 왜 운동회를 일요일에 여는 학교는 한 곳도 없나요"라고 되물었다.

한 아버지는 "월차까지 내서 참석했는데 아버지가 오지 않는 게 당연하다는 듯 프로그램이 하나도 없다"며 "학교 행사에 아버지들의 참가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정작 여건은 마련해주지 않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찬조금-마지 못해 내는데, 자발적이라는

운동장 한켠 '학교발전기금 접수처'라는 팻말을 내건 천막이 보였다.

학교측에선 운동회에 참석한 학부모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내놓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접수하고 있는 사람은 교사였다.

어느 반 누구 학부모가 얼마를 냈는지 명단까지 꼼꼼히 적고 있었다.

한 학부모는 "학년당 일정액을 맞춰야 한다며 어머니회 간부 엄마가 어제 전화를 해 어쩔 수 없이 돈을 준비했다"며 "돈을 낸 명단이 담임 선생님에게 전달된다고 하는데 가만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라고 했다.

옆에 있던 한 어머니는 "운동회 연습 기간에 음료수를 사서 돌리고, 단체 공연 의상 준비하고, 발전기금 내고 하느라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며 "요즘도 학교가 이렇게 가난한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했다.

학교발전기금은 순수한 찬조금이어야 한다.

누가, 얼마를 내는지 알려져서도 안 된다.

하지만 많은 학교들이 운동회 때 공개적으로 발전기금을 받는 걸 당연스레 여긴다.

교육청도 자발적으로 내고 법정 절차에 따라 쓰이면 문제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모든 어린이들에게 훤히 보이는 운동장 천막 아래, 팻말까지 내걸고 걷는 돈이 과연 얼마나 학교와 교육 발전에 도움이 될지 되묻고 싶은 학부모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최두성기자 dscho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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