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저소득 가정 아이들 "학원? 우리에겐 '사치'에요"

저소득 가정의 부모들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녀교육을 절실히 원하고 있다.

하지만 생활비 대부분을 정부보조에 의존하는 형편에다 정부가 등록금 보조는 하고 있지만 사교육비 보조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어 자녀 교육에 어려움이 많다.

각 복지관이 운영하는 '방과후 교실'도 아이들의 보육.생활관리에 주안을 두고 있어 성적향상과는 거리가 먼 실정이다.

복지 관계자들은 학원수업을 원하는 저소득 가정 자녀들이 많지만 현실적으로 이들을 학원으로 이어줄 지원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저도 이제 학원 다녀요"

보람이(가명.14.여중2학년.대구 지산동)는 2년전부터 인근 한 입시학원장의 도움으로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공부에 부쩍 재미가 많아졌다.

매주 월~목요일 방과후 학원에서 과학.수학수업을 들으면서 학교수업을 예습하기도 하고, 학원 선생님한테서 숙제 지도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방과후에 학교 앞에서 기다리는 학원버스를 타고 가는 친구들이 제일 부러웠어요". 학원에 못 다닌다는 사실이 창피했다는 보람이의 솔직한 고백. 하지만 학원을 다니고 싶은 소망은 '꿈'에 불과했다.

간질환(6급 장애)을 앓고 있는 아빠(46), 지체장애가 있는 엄마(38), 장애로 한쪽 팔이 제대로 펴지지 않는 동생(11)…. 지난해 초 만해도 학원은 '사치'나 마찬가지였다.

학원 대신 보람이는 매일 집으로 향했다.

엄마가 공공근로를 나가느라 비운 집과 식구를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저녁 늦게나 오시는 엄마를 대신해 빨래, 상차림을 도맡다시피 한지도 벌써 몇 년째 됐다.

늘 자리에 누운 아빠의 다리나 팔을 주물러주는 일도, 동생의 숙제를 봐 주는 것도 보람이의 몫.

이런 처지의 보람이에게 따뜻한 체온을 나눠준 이는 '여민락 입시학원'(대구 범물동)의 천창기(38)원장. 지난 2001년 5월 학원 문을 열면서 인근 복지관에 요청, 학원에 가고 싶어하는 저소득 가정 자녀들을 모아 무료로 수업을 듣게 했다.

"대학생일 때 야학을 하면서 어려운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학원을 시작하면서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이게 가장 좋을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추천을 받은 아이들이 10여명. 천 원장은 아이들에게 '몇 과목이든 수강료 없이 들을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혹 수업에 성실하지 않을 땐 모질게 야단도 쳤다.

학원 덕분에 보람이의 학교 수업도 더 즐거워졌다.

지난 해 30등 중반이던 보람이의 반 석차도 20등으로 껑충 뛰었다.

학원비를 내지 않고 다니는 '공짜 학생'이지만, 보람이는 학원 선생님의 말씀 하나라도 놓칠세라 맨 앞자리에 앉는다.

그런 보람이는 며칠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학교를 마치고 인근 문구점을 봐주는 일이다.

1시간 가량 가게를 봐주고 받는 돈은 한 달에 고작 1만 2천원. 3학년 올라가기 전에 용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

힘들지 않느냐고 했더니 아르바이트 끝내고 학원가도 시간은 충분하다며 웃는다.

"원장님이 참 고마워요. 학원 수업을 듣도록 허락해 주셨으니까요. 그러니까 더 열심히 공부해야죠. 공부 못하면 미안하잖아요". 도움주실 곳 지산종합사회복지관 053)781-5156.

◇저소득 가정-학원-복지관 연계해야

복지 관계자들은 사교육이 보편화된 만큼 학원을 다니고 싶어하는 저소득 가정 자녀들을 위해 사설학원과 복지관이 연계.지원하는 사교육 지원프로그램 개발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지산종합사회복지관 이경숙(31.여) 사회복지사는 "많은 저소득 가정의 부모들은 자녀가 공부에 관심을 느끼지 못하거나, 성적이 떨어진 것을 가난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며 "그래서 학원을 가장 보내고 싶어한다"고 했다.

이씨에 따르면 그러나 보람이와 같은 케이스가 드문 것이 현실이다.

입시.예능학원에서 저소득 가정 자녀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려면 학원 운영자의 의지가 필요할 뿐 아니라, 여지껏 복지관 차원에서 장기적으로 학원과 아이들을 이어주려는 기획사업이 거의 없었기 때문.

"부모측의 일방적인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학원을 다니고 싶어하는 아이들만 선별, 추천하는 복지관측의 주의가 필요합니다".

남구종합사회복지관 임우현(30) 재가복지팀장은 "자원봉사자 대학생들이 방과후 수업을 하고 있지만, 주로 아이들의 생활지도에 치중하고 있다"며 "학원에서 평범한 가정의 아이들과 어울림으로써 사회성이 개발될 뿐 아니라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의지가 생길 수 있다"고 했다.

안심 제1종합복지관 이용덕(32) 과장은 학원-저소득 가정간 연계프로그램의 필요성이 절실하지만 지속되기가 힘들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기초수급자 가정의 어린이 1명을 학원측의 배려로 수업을 받게 했지만, 학원이 문을 닫은 뒤 지원해줄 다른 학원을 찾지 못한 것. 이 과장은 "특히 예능계를 지원하고 싶은 저소득 가정 아이들은 학원비를 마련하지 못해 꿈을 접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라며 학원측의 도움을 호소했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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