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이 공휴일에서 제외된 지 오래됐다.
내년부터 주5일 근무가 전면 실시되는 마당에 명분과 실효성이 있는 한글날을 휴일로 복원하는 것이 우리 국어의 안타까운 현실로 미루어 보아도 마땅한 일일 것 같다.
한글날을 보내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인간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동물과 비슷하지만 체계적이고 발달된 말과 문자를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모든 동물을 제치고 단연 영장류의 위신을 갖추게 된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 문자나 말로 이루어진 지식과 정보를 다른 말과 문자로 바꾸어 주는 번역의 기술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인간이 단연 우수한 지능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성서의 창세기편에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인간을 벌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각각 다르게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의 진위(眞僞)를 제쳐두고라도 인류의 언어가 민족과 국가에 따라 다르다는 것은 천형과도 같은 고통이요 불편함이다.
그러나 인간은 번역이라는 기상천외의 방법을 동원해서 그들을 갈라놓은 언어의 장벽을 허물어 왔으며 지금도 허물고 있다.
바야흐로 21세기는 정보화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번역의 시대이다.
이제 모든 지식과 정보가 번역으로 재해석되고 재포장되어서 국경을 넘고 시차(時差)를 극복하고 있다.
우리는 그 동안 서구의 지식과 정보를 얻어오는 데에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임진왜란을 극복해낸 기록인 서애 류성룡 선생의 '징비록(懲毖錄)'이 영역(英譯)되어 미국에서 만만찮은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지식정보도 번역으로 재포장해서 이를 세계시장에 내놓으면 상당한 경쟁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한문 '리조실록'을 현대어로 번역하는데 앞장섰음을 자랑하고 있는 터에, 우리의 입장이 살아나려면 우리는 이를 영어로 번역해서 세계의 지식시장에 내어 놓아야 할 일이다.
이와 아울러 우리의 고전을 번역할 외국의 학자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다.
세종대왕이 지금 살아계신다면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신문과의 전쟁보다는 이 일을 우선해야한다고 타일렀을 것 같다.
세종은 왕이기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바탕인 한글을 창제하고 이 한글의 실용가치를 확인하기 위해서 언해(諺解)로 번역을 직접하기도 하고 학자들에게 시킨 점에서 그 위대함은 더욱 크다.
그는 분명 한국번역의 아버지이며 문화정책으로 국가의 정체성(正體性)을 확립한 정치가라는 관점에서 정보화 시대인 오늘날 다시 평가해야할 것이다.
세계 문명의 큰 맥락에서 번역은 언제나 어디서나 중요한 기능을 했다.
일본의 근대화를 가능케 한 명치유신(明治維新)의 번역정책은 오늘의 일본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나아가 일본을 세계적인 번역 국가로 만드는 초석을 놓았다.
중국의 경우 당나라 때부터 불경(佛經)번역에 국력을 기울여 유학 중심의 중국사상에 새로운 자극과 거울로 삼았으며 이렇게 번역된 한문불경이 우리나라에 전해져서 우리는 불경을 한문으로 읽게 되었고 이를 목판에 새겨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있게 되었다.
서구문명이 중세 기독교 문명을 정리하고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성서의 영역(英譯) 불역(佛譯) 독역(獨譯)이 이루어졌으며 이것이 서구 종교개혁의 핵심 과제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史實)이다.
번역이 문명의 변천에 기여한 이러한 예는 역사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서구와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는 번역(Inbound translation)에 골몰하고 있다.
그나마도 제대로 해내고 있지 못하는 것은 대학마다 외국어 교육에는 열을 올리면서도 정작 번역교육은 등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EU제국과 중국, 캐나다, 호주 등의 나라에서는 번역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대학의 정식 교육과정으로 채택하고 있으며 이러한 추세는 매년 점차 확대되고 있다.
이들 나라에서는 외국어 교육의 중요한 목표를 번역교육에 두고 있다.
번역은 실지 필요하고 중요한 지식과 정보를 옮겨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번역은 교육의 기능을 지닌다.
번역은 국어를 풍요롭게 하고 바르게 쓰도록 하는데 도움을 준다.
번역을 게을리하거나 함부로 하면 국어가 죽는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번역은 국어교육을 효과적으로 만들어 주고 나아가 외국어교육의 직업화와 현실적 가치를 지니게 한다.
이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하실 때에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이다.
유명우(호남대 교수.한국번역학회장)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