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과거로의 거리와 먼 미래로의 거리는 어쩌면 일치할는지도 모른다.
새로움이 미래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보편화된 착각이다.
새로움은 과거에도 있지만, 다만 잊혀졌을 뿐이다.
과거를 경유하지 않고 미래로 나갈 사람은 없다.
누구보다도 학자나 예술가는 이 사실을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이들은 앞서간 사람들이 걸었던 길을 걷다가 우연히 자기의 길을 발견했을 뿐이다.
무엇을 발견하거나 창조하는 사람이 겸손해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왜냐면 그에게 있어 '모든 것은 내 것이고 내 것인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Omne meum nihi meum). 벌이나 나비가 꽃에게서 꿀을 취하고 자기 꿀이라고 한다면 꽃은 무어라 할 것인가? 그러나 그런 억지를 쓰는 벌이나 나비도 없고 "도둑이야" 하고 소리치는 꽃도 없을 것이다.
가을 그림자가 드리운 바닷가 백사장을 한 남자가 거닐고 있다.
해안선을 향해 모래와 자갈을 밀어 올리며 밀려오는 파도는 그의 과거이다.
그러다 다시 먼 수평선을 향해 되돌아가는 파도는 그의 미래이다.
가다가 발을 멈추고 문득 시계를 들여다본다.
시계는 시간을 가리키지만, 영원을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의 주기야말로 시간의 기본 단위일는지 모른다.
자연의 호흡과 인간의 호흡이 일치한다면 인간은 훨씬 덜 서두르고 허둥대지 않을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발걸음은 시간을 재고 있었다.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이런은 나이 삼십에 이미 늙었다고 탄식하지 않았는가? (At the age of thirty I feel old). 로우얼은 "사십을 넘으면, 다음은, 그 다음은"(After forty, what's next, what's next?) 하고 말을 잇지 못하지 않았던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십 고개를 넘으면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다시 가파른 고개일까, 아니면 내리막길인가? 불확실한 가운데서도 확실한 것 하나는 그때부터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길가에 고인 물 속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게 된다.
가만히 서있어도 달리는 듯 숨이 가빠진다.
그러나 사십 고개를 이 정도로 넘길 수 있다면 행운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단테처럼 삶의 중간 지점에서 길을 잃어버렸던가? 잃기는 쉬워도 찾기는 어려운 것이 길이다.
줄기는 가지 때문에 찾기 어렵고, 길은 곁길이 많아 헤매게 된다.
사람은 한적한 산 중에서 보다 통행이 빈번한 사람들 속에서 더욱 쉽게 길을 잃어버리곤 한다.
사람은 유혹이자 함정이다.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갔다가는 십중팔구 길을 잃게 된다.
그렇다고 만나는 사람들 모두다 오디세우스가 낯선 지중해의 해안에서 만난 사이렌과 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가는 곳마다 시간 속에서 부서진 배들과 백골이 난무할지라도, 때로는 칼립소의 섬이 나타나고 연꽃을 먹는 사람들도 만나게 되지 않는가? 길을 잃지 않고 어찌 길을 찾을 수 있으랴? 때로는 돌아가고 때로는 헤매는 가운데 찾고자 하는 것을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지나고 보면 테니슨의 유리시스처럼 우리는 우리가 만난 것들의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I am a part of what I have met).
가을 하늘 밑을 걸으면서 귓가에 아무 노래 소리도 들리지 않는 자는 어쩌면 복이 있는지도 모른다.
죽음에 이르는 아름다운 유혹의 노래 소리에 귀를 막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는 과연 안전한 것인가? 오히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기에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는가? 소풍갔다가 문득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 언젠가 다가올 것의 경고가 아니던가?
결코 뉴스에는 보도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과 실종 사건, 백두산 천지에 비친 가을 하늘 속을 걷다가 길을 잃게 된 이들의 슬픈 소식들, 또 길 잃은 그들을 따라가다 보니 길을 잃게 된 사람들의 허망한 경우. 휴일 하루 다들 나그네가 되고 싶은 마음을 알 것도 같은데, 산꼭대기까지 가득 찬 인파, 어느 단풍이 더 곱다할지, 고운 것은 다 허망하다는데, 다들 모르는 것인가, 가을에 모든 것은 절반쯤 죽는다는 사실을, 아무도 못 보는 것인가, 나무 아래 소슬 바람이 절름거리며 낙엽을 쓰는 것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에 자막을 달아주는 일, 그것이 나의 일인 것만 같은데, 휴일 날 예식장처럼 어수선한 우리 세상, 가을의 아포리즘이 어쩌고 하는 주례사를 누가 듣는단 말인가, 신랑 신부도 안 듣는데.
최병현 호남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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