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파호(琵琶湖)의 밤은 현란했다.
매서운 날씨에도 불 밝힌 유람선들은 날 새는 줄 모르는 듯했다
호수는 넓었다.
바다 같은 호수였다.
수많은 빌딩(대다수 호텔)이 호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호텔 난간에서, 배 위에서 찬바람조차 정겹게 받아들였다.
시가(滋賀)현의 중앙을 불꽃 모양으로 넓게 수놓고 있는 이 호수를 현지 사람들은 '어머니 호수(Mother Lake)'로 불렀다.
비파호의 남쪽 호숫가는 유람선과 빌딩, 사람들이 어우러져 밤늦게까지 떠들썩했다.
밤 풍경이 아름다운 어머니 호수였다.
비파호를 중심으로 한 시가현은 300~500년대 대가야가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헤치고 도달한 오사카와 동해를 거쳐 맞닿은 후쿠이를 내륙으로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왜(倭) 야마토(大和) 정권의 근거지인 나라(奈良), 오사카(大阪)의 동쪽에 자리잡았고, 북으로 후쿠이(福井), 서로 교토(京都), 동으로는 기후(岐阜)와 미에(三中)현이 둘러싸고 있었다.
내륙교통의 연결고리인 만큼 그 연결 교통을 방증하는 당시 유물이 바로 비파호에서 발견됐다.
비파호 동쪽의 간척지, 시가현 반다(坂田)군 마이바라(米原)정 '이리에나이코우(入江內湖) 유적지'. 이리에나이코우는 일본이 연인원 100만 명을 동원, 5년 동안의 간척사업을 통해 비파호 90만평(길이 8km)을 메운 곳으로, 신석기부터 근대까지 각종 유물이 출토된 유적지다.
여기서 대가야의 고령 양식이 분명한 목 긴 항아리(長頸壺)와 접시 뚜껑(蓋)이 나왔다.
목 긴 항아리는 400년대 후반 대가야 최전성기, 고령 지산동 44호 무덤에서 나온 항아리와 같은 양식이다.
항아리 밑바닥에는 그릇 받침 위에 얹어 가마에서 구운 흔적이 뚜렷했고, 뚜껑에는 세 겹의 점이 나란히 둘러싼 무늬(點列紋)와 젖꼭지 모양 손잡이가 드러났다.
오사카나 후쿠이를 거쳐 전해진 대가야 유물이었다.
이 유적지에서는 또 소가야(경남 고성) 굽다리 접시도 함께 출토됐다.
당시 대가야와 소가야의 관계를 가늠할 수 있는 징표였다.
대가야는 400년대부터 섬진강 하구(경남 하동)를 둘러싸고 백제와 접전을 벌이다, 500년대 초 하동이 백제의 영유권으로 넘어가자 소가야 세력과 손을 잡게 된다.
섬진강이 아닌 새로운 해상루트(고성)를 뚫기 위한 포석이었던 것. 500년대 초반 고성 송학동 무덤에서 대가야 토기가 30여점이나 나온 것도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다.
이리에나이코우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비파호 간척자료관의 팸플릿에는 점열문과 젖꼭지 손잡이가 또렷한 대가야 그릇 뚜껑이 겉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대가야 토기의 아름다움과 오묘함에 일본인들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
도쿄(東京)의 북서쪽 사이타마(埼玉)현 '이나리야마(稻荷山) 고분'. 400년대 후반 이 지방 호족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에서는 대가야 말 장신구들이 대거 쏟아졌다.
F자 모양 말 재갈, 방울 모양 말띠드리개(鈴杏葉), 말띠꾸미개(雲珠), 세 고리 방울(三環鈴), 금장식 띠(帶金具) 등이 모두 국보로 지정돼 있었다.
1천500년 전 대가야에서 뱃길을 따라 왜의 내륙까지 흘러든 유물이 일본의 국보로 지정돼 있다니. 묘한 여운이 남았다.
사이타마현 사키타마자료관에 보관된 이들 유물 중 금 상감으로 글을 새긴 칼(金錯銘鐵劍)은 이 시기 왜 왕권과 지방호족, 대가야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주요 유물이었다.
칼의 보존처리를 위해 녹을 제거하던 중 드러난 글귀에는 471년 왜 야마토 왕권과 사이타마 세력간의 관계, 당시 왕의 이름 등이 적혀 있었다.
왜 왕권이 오사카나 나라 주변에서 만든 뒤 사이타마의 지방호족에게 하사한 칼로 추정됐다.
그러나 이보다 더 궁금한 대목은 이 칼의 제작자가 누구였느냐 하는 점이었다.
당시 왜가 철 제작 기술이나 상감 기법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왜로 이주한 대가야인이 만들었을 가능성을 점쳐 볼 수 있었다.
이나리야마 고분의 주인돌방(主石室)에서 나온 대다수 철제품이 대가야 양식이고, 이 칼도 이들 유물과 함께 출토됐기 때문이다.
오토모 츠토무(大友務) 사키타마자료관 관장은 "무덤 속 유물로 볼 때 5세기를 전후해 가야에서 왜 왕권에 전해진 철제품이 다시 사이타마 지배층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이타마현 이나리야마 고분에 인접한 '쇼군야마(將軍山) 고분'의 경우 축조시기가 대가야 멸망 이후인 500년대 후반이지만 투구를 비롯해 출토된 말 장신구 대다수가 한반도에서 전해진 것으로 양국 학계는 보고 있다.
오사카의 동쪽 일본열도에는 이처럼 시가, 사이타마, 군마(群馬)를 비롯해 나라, 후쿠이, 기후, 도야마(富山)는 물론 혼슈(本州)의 북쪽 야마가타(山形)현까지 대가야 유물이 전파됐다.
나라 '니이자와센츠카(新澤千塚) 109호분'의 금 귀걸이, 후쿠이 '텐진야마(天神山) 고분' 및 '무쿠야마(向山) 고분'의 금 귀고이, '쥬젠모리(十善森) 고분'의 말 장신구, 기후 '곤겐야마(權現山) 고분'의 목 긴 항아리 등은 대표적 대가야 유물이다.
규슈(九州)의 후쿠오카(福岡), 구마모토(熊本), 사가(佐賀), 가고시마(鹿兒島)현, 혼슈의 시마네(島根), 와카야마(和歌山), 효고(兵庫)현, 시코쿠(四國)의 에히메(愛媛)현 등 서 일본열도까지 포함하면 그야말로 홋카이도(北海島)를 제외한 일본열도 전역에 대가야의 영향이 미친 셈이다.
왜로 향한 대가야의 주 교통로는 쓰시마(對馬島)를 거쳐 세토나이카이를 통과해 왜 왕권의 근거지인 오사카까지 가는 루트였고, 쓰시마에서 동해를 거쳐 후쿠이로 향하는 또 다른 루트도 상정할 수 있다.
이 교통로를 벗어난 내륙지역 유물의 경우 왜 왕권이 지방호족에 하사했거나 대가야 이주민들이 직접 전파했으며, 일부는 현지에서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대가야가 이처럼 상당량의 유물을 왜에 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또 그 전파방식은 일방적이었을까. 예나 지금이나 국제관계에서 '일방적' 문화전파나 교류는 있을 수 없는 일일 터.
대가야권에 왜의 산물인 야광조개와 스에키(須惠器;왜 토기), 바람개비 모양 청동그릇(巴形銅器) 등이 출토되고 있다는 사실은 문물의 상호전파를 시사하고 있다.
또 400년대 중반~500년대 초반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의 복잡한 정치상황에서 양국 관계를 짚어볼 수도 있다.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우호적 관계에 대응해 대가야는 백제, 왜와 상당기간 동맹관계를 맺었다.
또 400년대 후반 일정기간 동안 섬진강 루트와 전북 남원 일대를 지키기 위해 왜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백제를 견제하기도 했다.
결국 대가야는 고구려와 신라의 공략에 대비하고, 한 때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왜로부터 군사적 지원이나 영토방위에 대한 약속을 받는 대신 제철기술이나 토기, 철제품, 장신구 등을 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에 뿌려진 문물 상당수는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독자적 생존을 모색한 대가야의 정치적 산물인 셈이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 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단독] 김민석 子위해 법 발의한 강득구, 金 청문회 간사하려다 불발
李대통령, 대북전단 살포 예방·사후처벌 대책 지시
李대통령, 취임 후 첫 출국…G7 정상들과 양자회담 주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