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이 다 보는 것을 혼자만 못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분명히 보는데도 옆에서 안 보인다고 우기는 바람에 못 본 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벌거벗고 백성 앞에 나섰답니다.
그런데 어르신은 왜 그렇게 벗으셨습니까? 아니라고요? 감색 양복에 붉은 넥타이로 차려 입으셨다고요? 그런데 우리 눈에는 벌거벗은 권력의 알몸만 보이니 웬 일입니까?
날이 춥습니다.
한 겨울에 어쩌자고 그렇게 벗고 나서십니까? 감기에라도 걸리실까 걱정됩니다.
가뜩이나 괴기한 독감이 유행이라는데 말입니다.
나라가 처한 환경이 춥고 어두워 앞날이 수상쩍기 한량없습니다.
오죽하면 과묵한 추기경께서 '나라가 걱정'이라고 하셨겠습니까? '큰 차 탄 네가 더 나쁘다'고 해봤자, 살기 바쁜 백성들에게는 다 같이 차 탄 이들끼리 벌이는 삿대질일 뿐입니다.
측근들이 줄줄이 감옥에 끌려간 판에, 비서고, 도백이고, 장관이고, 마구 선거판으로 차출하니 나랏일은 뒷전입니까? 우선 춥다고 기둥뿌리 뽑아서 불 때면 어떡합니까? 세인들은 당적을 바꾸지 않으면 감옥에 갈 사람들이 아직도 여럿 있다고 합니다.
'올인'이라는데 그건 카지노에서 베팅할 때 쓰는 말 아닙니까? 그렇게는 이겨도 떳떳하지 못합니다.
벌거벗고 싸워 이긴들 누가 승복해서 박수치고 존경하겠습니까? 이제 옷을 입으시지요. 권력이 금도를 지킴으로써 스스로를 지키게 말입니다.
남의 이목이 있습니다.
제깟 것들도 벗으면 다 알몸일 뿐이라고요? 그야 그렇지요. 내 권력 내가 쓰는데 남이 뭐라는 게 대수냐고요? 그도 그렇지요. 그러나 옷이란 몸뚱이나 가리려고 입는 게 아니랍니다.
그리고 사람은 남과 더불어 사는 법입니다.
옷은 사람 사이에 예를 갖추는 형식이라는 말입니다.
말의 앞과 뒤가 맞지 않고, 말과 행동이 또한 다르니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벌건 속을 드러내는 것은 삼가고 지키는 예가 아닙니다.
충청도 표 좀 얻어 보자고 신행정수도 얘길 꺼냈다가 '재미 좀 보았다'고 하셨지요? 이젠 숫제 '수도를 옮겨 지배계층을 바꾸겠다'니 대체 무슨 말입니까? 통일이고, 문화국가고, 세계화고, 권력 외에는 도무지 안중에 없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리고 총선 앞두고 불쑥 내민 '신국토 구상'은 또 뭡니까? 네트워크 시대라고 남들은 없는 인연도 새로 만드는데 어쩌자고 안보동맹은 저버리고 FTA는 밀치십니까? '자주'니 '민족'이니 하는 말은 아주 기껍고 가슴시린 말입니다.
그러나 그게 배타적인 길을 택하면 뜻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걸 큰 소리로 외치면 남들이 외면합니다.
세상에 자주 안 하려는 나라, 제 형제 등지고 싶은 천치가 어디 있습니까? 믿을 만한 친구와 대사를 의논하고, 못된 짓을 하면 형제도 나무래야 하는 법입니다.
부디 옷을 입으시지요. 세계의 이웃과 친구들이 예를 갖추게 말입니다.
민망합니다.
시정의 필부필부도 염치없이 벌거벗고 나서면 보기 흉한 것입니다.
하물며 나라를 이끄는 높은 자리에 있는 분임에야 어떠하겠습니까? 그런 분일수록 옷을 품격 있게 갖추어 입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처신이 점잖아지고 이치와 도리에 맞는 말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여유와 멋을 갖추면 뭇 사람들이 우러러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정말이지 아이들에게 본받아 따르라고 할만한 지도자를 갖고 싶습니다.
그런데 기성의 권위를 깨버리는 것이 모토라니 이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부수자고 한 것은 잘못된 권위였습니다.
이를테면 '권위주의적' 이라는 말은 독재 대신에 썼던 용어입니다.
그런데 명장, 석학, 경영인, 지도자의 권위를 무너뜨리면 무엇으로 정치를 하겠다는 것입니까? 콘서트의 지휘자가 연미복을 입는 것은 음악에 대한 경외요, 관객을 위한 배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름답지 않습니까?
옷을 벗고 몸뚱이를 드러내는 것은 단지 가식의 껍데기를 벗기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신을 내보임으로써 수치심을 유발시켜 내면의 가치를 말살하는 것입니다.
고문에서 보듯이 그것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시체에도 옷을 입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무릇 인격의 본질이 벗는데 있는지 감싸는 데 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옷을 입으시지요. 높은 품격의 향기가 사위에 퍼져나가게 말입니다.
벌거벗은 임금님 옆에 바른 말 하는 신하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그 임금님이 두고두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옷을 입으시지요. 따뜻하고 점잖고 멋있어질 것입니다.
어르신과 함께 나라가 말입니다.
유우익 서울대교수.지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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