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이라크 파병안이 국회본회의를 통과함으로써 한-미간에 미묘한 파장을 낳았던 현안의 하나가 마무리되었다.
미군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두 여중생을 추모하고 SOFA개정을 요구하는 촛불시위의 와중에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은 출범 직후부터 한미간에 많은 껄끄러운 현안을 다루어야 했고, 그럴 때마다 분열된 국민여론 속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던 중 지난 1월 소위 '동맹파'와 '자주파'간의 갈등으로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이 경질되면서 노무현 정부의 외교가 '반미'일색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윤 장관의 경질이 특히 주목을 끈 것은 연두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이 직접 '공약으로 내걸고 국민의 선택을 받아서 대통령이 된' 정책을 따르지 못하는 공무원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여론을 읽는 탁월한 감각이 있는 대중정치가로서 대통령이 국민여론 속에서 반미의 정서를 읽고 있는 것일까?
실로 한미동맹조약 체결 50주년을 맞은 시점에 미국에 대한 한국국민들의 시각이 곱지 않다.
2003년 7월의 한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32%가 미국이 한국의 안보를 가장 크게 위협하는 국가라고 꼽았다.
같은 수치는 2004년 1월 39%로 늘어나 북한을 앞질렀다.
또한 노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미국에 대한 독특한 시각을 노정해왔다.
후보시절 "반미주의면 어떠냐"고 반문하고, 대통령이 된 후에도 한미관계를 거론하면서 '자존심 상함'과 '속상함'을 언급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국민들의 정서는 일반적 '반미'가 아니고, 대통령이 읽은 것도 그것이 아니다.
국민들의 정서에 흐르는 것은 '국가적 자존심'이다.
'반미'는 그것이 상황적으로 파생되어 나타난 것일 뿐이다.
그리고 '국가적 자존심'은 특히 민주화 이후 회복한 '국민적 정체성'의 발로이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사람에게는 외부의 그 무엇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을 추구하고 그로써 심리적 안정성을 도모하는 본연적 경향이 있다고 한다.
혈연, 학연, 지연을 찾고 따지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근대 국민국가시대에 정체성의 가장 크고 궁극적 단위는 국가이다.
애국심과 민족주의는 스스로를 자신이 속한 국가와 동일시하여 '내 나라, 내 민족'을 찾을 때 나타난다.
영국의 역사학자 EH 카에 따르면 근대 민족주의는 국가의 주인인 민족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민족의 주체는 유산계급이었다.
20세기초 보통선거가 일반화된 이후 민족의 주체는 한 영토 위에 사는 모든 사람이 되었다.
곧 민주주의의 발달은 근대민족주의의 전개와 궤를 같이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 국민들은 개인적으로는 주인의식을 성장시키고 집단적으로는 '대한민국 민족주의'를 키워왔다.
1997년 외환위기 때는 금모으기로, 2002년 월드컵 때는 길거리응원으로 나타난 바로 그 민족주의이다.
꽃다운 두 여중생의 사망과 사고책임자에 대한 무죄평결로 인식하게 된 SOFA의 불평등성이 촛불시위를 가져왔다.
우리에게 미국의 존재가 워낙 크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에 국가적 자존심이 반미로 표출될 가능성은 항상 그리고 높게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미국이 대표하는 가치를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거나 미국이 하는 모든 일을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일반적 반미의 발로는 아니다.
대통령의 발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와 같은 '국가적 자존심'을 읽고 있는 것 같다.
'자주국방'을 이야기하고 미국과의 관계에서 '자존심'을 이야기하는 것은 미국이 싫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국민들의 국가적 자존심을 읽은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에서 그와 같은 자존심을 충족시키기에 우리의 국제정치적 현실이 열악하고 외교적 역량과 경험이 모자란다.
유별나게 많았던 한-미관계의 현안을 둘러싸고, 그와 같은 현실을 무시한 채 논란을 벌인 정치권으로 인해 국민들의 혼란과 분열만 가중되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권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국가적 자존심을 내세우고자 하는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자랑할 만한 '내 나라'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것은 미국에 대한 안보의존이 아니라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권이다.
그래서 '참신하고 젊은' 대통령을 뽑았고 정치개혁에 대한 욕구가 이처럼 뜨겁다.
총선이 두 달이 채 남지 않은 지금도 정치권은 이걸 모르거나, 알고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뜨거운 맛을 봐야 하나.
김태현(중앙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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