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희망편지-학부모가 무슨 죄

새 학년 새 학기, 이런저런 취재나 만남 때문에 돌아본 학교들은 시끌벅적했다.

신입생뿐만 아니라 재학생들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분주했다.

새 교과서, 바뀐 선생님, 새 친구들, 새 교실. 일 년 단위로 한꺼번에 닥치는 변화들을 좇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때쯤 학부모들의 심사도 학생들 못지않게 복잡하다.

가장 큰 고민은 담임 교사가 어떤 사람이냐는 것. "자식을 맡겼잖아요. 어떤 사람인지, 성격은 어떤지, 우리 아이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한 건 당연하죠. 한 번 찾아가서 인사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조금 더 속내를 물어보면 "촌지를 받는 분인지, 식사 대접은 응하시는지, 과연 어떻게 해야 우리 애를 잘 봐 주실지 그게 관심사"라고 한다.

"가장 정확한 정보는 역시 선배 학부모들에게서 나온다.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일 년은 무사히 지나간다"고 한 수 일러주기도 한다.

일견 온당해 보이지만 학부모들의 의식은 출발점에서부터 비틀려 있다.

자식을 맡긴다는 것은 전근대적인 교육 체제에서나 통용되던 말이다.

산업사회에서의 학교는 민주시민 육성이라는 국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양성소다.

개개 학생들이 사회인으로 살아갈 자질과 능력을 갖추게 만든다는 점에서 학부모도 그 한 축을 담당하는 당당한 주체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론적인 이야기일 뿐, 학교에서 당당하게 어깨를 펼 수 있는 학부모는 많지 않다.

속물적으로 말한다면 성적 우수한 자녀를 뒀거나, 학교에 냉.난방기, 정수기쯤은 기증해야 체면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교사를 보는 태도 역시 본질에서 어긋나 있다.

촌지 문제만 해도 담임 교사가 이를 받느냐 마느냐 하는 극히 개인적인 일로 치부해 버린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의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곧잘 얘기해왔다.

그러나 실제 추진된 많은 의식개혁 정책들은 인간의 의지나 의식에 지나치게 기대한 나머지 변변한 성과를 거둔 적이 거의 없다.

인간을 둘러싼 사회적 이해관계의 구조에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부모의 의식을 개혁하려 한다면 그 같은 의식이 왜 생겼는지를 살펴 원인부터 해소해야 한다.

내 자식만 잘 되기를 바라는 이기심, 교육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 뭉친 존재로 학부모를 파악해서는 안 된다.

촌지 문제도 마찬가지다.

몇몇 교사들의 촌지 수수 관행을 그들만의 도덕성 문제로 치부해서는 결코 뿌리뽑을 수 없다.

의식개혁의 성과는 당사자들이 거기에 따를 경우 이득이 돼야 한다.

손해가 볼 것이 뻔한 의식개혁 요구에 따르지 않는 건 당연하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학교 안팎의 이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도 해결의 길이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학교의 문을 더 활짝 여는 것이다.

학교 운영은 밖에서도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투명하고 개방적으로 바꿔야 한다.

학부모회를 '그들'만의 모임으로 버려두지 말고 열린 구조로 활성화해야 한다.

학교의 중요한 의사 결정과 추진 과정에 참여하도록 끌어들여야 한다.

권한을 주고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

민주적인 학부모회 활동을 통해 내 자식이 손해 보지 않고, 잘 될 수 있다면 어느 학부모가 외면하겠는가. 무엇 때문에 학교에 가고 교사를 만나기 꺼리겠는가. 학부모가 무슨 죄인도 아닌데. 김재경기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