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고갱이-삼국의 발전

중앙집권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삼국은 다양한 정복사업을 펼쳤다.

안으로 부족적 전통을 극복해 중앙 집권을 강화했다.

이후 삼국은 본격적인 경쟁기에 돌입, 외교와 전쟁이 되풀이됐다.

5세기는 고구려의 시대였다.

4세기 후반 고구려 소수림왕(재위 371~384)은 팽창을 중단하고 국력 재충전에 들어갔다.

불교수용으로 사상을 통일했다.

율령제정 등으로 대대적인 체제개혁을 단행했다.

내부개혁을 바탕으로 광개토왕과 장수왕 때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았다.

광개토왕(재위 391∼413)은 18세에 왕좌에 올랐다.

대대적인 정복사업을 펼쳤다.

서쪽으로 요동지방을 완전히 차지했다.

동북쪽의 숙신을 복속시켰다.

남쪽으로 한강 이북까지 진출했다.

만주 퉁구지방의 광개토왕비는 그의 위대한 정복 업적을 전해준다.

광개토왕의 위업은 장수왕(재위 413∼491)에 계승됐다.

장수왕은 남북조로 정리된 중국의 정세 변동에 능동적으로 대응했다.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했다.

적극적인 남하 정책 추진했다.

한강 이남의 아산만에서 영덕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시키고 백제 개로왕을 죽였다.

백제는 4세기 중엽 중앙집권화를 마무리지었다.

근초고왕(재위 346∼375)은 담로를 설치하고 지방에 대한 직접 지배에 들어갔다.

마한의 나머지 세력을 통합, 호남 곡창지대를 확보했다.

5호 16국이던 동아시의 정세변동을 이용, 과감한 팽창정책을 취했다.

백제의 세력은 요서와 산둥반도까지 미쳤다.

백제의 해상활동은 일본을 무대로 특히 활발했다.

백제왕이 왜왕에게 준 것으로 보이는 칠지도에 새겨진 글은 백제세력의 영향력을 말해준다.

왕인과 아직기를 일본해 파견, 유학을 전했다.

근초고왕은 고구려를 쳐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팽창정책을 계속했다.

그러나 5세기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위축돼 수도와 한강 유역을 빼앗겼다.

6세기 성왕(재위 523∼554) 시기는 백제의 희망과 좌절의 시기였다.

결단력이 뛰어난 성왕은 사비성으로 천도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국왕 직속 관청인 22부를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 좌평 중심의 귀족회의체를 약화시켰다.

그러나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유역 탈환 전쟁에서 동맹군이었던 신라군에게 역습 당해 한강을 빼앗겼다.

이 과정에서 성왕은 패배하고 전사했다.

성왕의 노력이 좌절된 후 백제는 급속히 약화되어갔다.

내물왕 이후 고구려의 정치적 간섭에 시달리던 신라는 5세기 눌지왕(재위 417∼458)때 백제와 동맹을 체결해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났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을 나.제동맹으로 저지했다.

신라는 6세기 들어 놀라운 발전을 거듭했다.

지증왕(재위 500∼514)은 지방행정구역을 마련, 부족의 자치권을 약화시켰다.

법흥왕(재위 514∼540)은 불교를 공인해 사상의 중앙집권화를 기했다.

율령을 제정해 통치체제를 정비했으며 병부를 통해 병권을 장악했다.

지증왕과 법흥왕의 내부체제 정비는 진흥왕(재위 540∼576)의 정복적 팽창을 가져왔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개편해 국왕에 직속하는 인재를 양성했다.

사정부(감찰기관)를 설치해 관리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강화했다.

한강유역을 차지해 비옥한 평야가 주는 인적, 물적 자원을 획득했고 서해를 통해 중국과 교통로를 열었다.

고구려의 함경도 남주지방까지 세력을 뻗쳤고 가야를 완전히 복속시켰다.

그가 세운 네 개의 순수비와 단양 적성비는 신라의 번성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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