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이 무척이나 화창하다. 산과 들에는 봄꽃이 만개하고 바람은 여인의 비단속 치마 자락처럼 부드럽다. 다시 찾아온 이 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니,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문학작품에서 법은 대개의 경우 비정하고 냉엄한 형태로 그려진다. 빵 하나를 훔쳤다는 이유로 죄인이 되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이 그렇고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이나 드라이저의 장편 '아메리카의 비극'이 그렇다.
그건 법이 가지는 엄밀성 혹은 사실성의 원칙에 연유한다. 법에는 인간이 가지는 추상적 의미나 수사적인 용어가 필요하지 않다. 보다 명백하고 엄존하는 사실적 행위만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 역시 그런 법의 사실적 판단으로 말미암아 곤혹스런 처지에 놓인다. 친구들과 어울려 바닷가에 놀러갔던 주인공은 사소한 시비에 말려들고, 아무런 살의도 없이 다만 단도의 날에 반사된 날카로운 태양광선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상대 아랍인을 권총으로 살해하게 된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사건 담당검사는 마리라는 주인공의 여자친구를 증인으로 불러 해수욕을 갔던 일이며 영화를 보았던 일, 둘이 함께 아파트에 들렀던 일 따위를 꼬치꼬치 캐묻는다. 그런 다음 피고가 비정하며 흉악하기 짝이 없는 파렴치범이라고 배심원들에게 말한다.
피고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날에 해수욕을 즐겼고, 부정한 남녀관계를 맺었으며 코미디 영화를 보았다는 게 검사의 발언 요지였다. 흔히 하는 일상적 행위일 뿐이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날이라는 게 그를 파렴치범으로 몰아간 이유가 된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가령 요즘처럼 따스한 어느 봄날, 한 남자와 유부녀가 우연히 만나서 정을 통한 게 법적인 문제로 발전했다고 치자. 재수 없게 피의자 신분이 된 여자는 조사담당 경찰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환-장하도록 눈부신 봄볕, 너무 아름답고 화사하게 피어난 봄꽃들 때문에 제가 잠시 어떻게 됐던가봐요. 그 누구라고 그 환한 봄볕과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며 벚꽃, 목련이나 진달래를 보면 마음 설레지 않곤 못 배길 거예요. 게다가 그 봄볕과 꽃들 사이에 서 있던 그 남자의 어깨가 왜 그리 한없이 초라해 보이던지, 예전 봄날에 죽은 작은 오빠를 떠올리게 하던지 그만…. 실제로 여자는 미치도록 화사한 봄날의 분위기에 취해서 남자를 쉬 받아들였던 것이다. 평소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로 가정에만 매달려 있던 그녀였다면 정말 어림 반 푼 어치도 없을 일이었다.
하지만 경찰관은 그녀의 진술을 듣고는 약간 짜증스럽게 내뱉을 것이다. 그 날 날씨가 환장하게 좋았든, 미치도록 봄꽃이 피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누가 먼저 어떻게 수작을 붙였는지 그 사실만을 얘기하란 말이오.
아마도 여자는 당시의 그 현기증이 일 만큼 아름답던 상황과 쓸쓸해 뵈던 남자의 어깨에 대한 의미를 결코 경찰관에게 납득시키지 못할 것이다. 만약 진술조서에 그 '환장하도록 아름다운 봄 날씨'란 내용이 적힌다 해도 어쩌면 부정한 여자의 바람기를 증명하는 말로 변해버릴 가능성이 적지 않다.
왜냐 하면 법은 상황적 의미보다는 현상적 사실만을 직시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법은 무자비하다. 그 날 두 사람이 가졌던 각별한 의미와 불꽃같던 감정을 빼버리면 그저 불륜이란 범죄적 현상만 남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은가. 삶은 의미를 부여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지니게 된다. 정신적 의미를 지니지 못할 때 모든 건 생존을 위한 물질적인 행위일 뿐이다.
이 봄, 꽃이 환장하도록 핀들 거기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그게 무엇이랴. 동동주 한 잔에 꽃잎을 띄우고 소중한 벗들을 불러서 담소를 나누지 않는다면 이 봄, 그저 쉽게 오가는 하나의 계절일 뿐인 것을. 친한 당신에게 묻는다. 살고 있는가? 아니면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가?
박희섭(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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