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위로부터의 개혁'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정부의 정책이 발표돼야 수동적으로 움직인다.
어렵고 힘든 때일수록 더욱 위를 쳐다보고 어떤 해결책이 내려오기를 갈망한다.
60, 70년대 소위 '개발 연대'의 눈부신 경제 성장은 위로부터의 강력한 개혁 소산물이었다.
그렇다보니 지도자는 남다른 카리스마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카리스마 콤플렉스'에 빠진 것이다.
지도자가 진정으로 갖추어야할 도덕성과 합리성, 그리고 문제 해결능력은 뒷전이다.
국민들은 "높은 사람인데 그 정도쯤이야…"로 치부해버리는 판단 미숙을 마치 덕(德)인양 교묘하게 위장하고 있다.
위로부터의 개혁의 한계다.
우리는 지금 그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 길들여진 '하향식 개혁'
대체로 위로부터의 개혁(top down)은 성공하기 힘들다.
대표적인 사례가 1884년 갑신정변이다.
당시 젊은 개화파들이 구한말 조선의 '세계화'를 위해 일으킨 갑신정변이 그 거창한 이념과는 달리 3일 천하로 끝난 것은 국민과는 전혀 교감되지 않은 일방적 하향식 개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이념으로 똘똘 뭉쳐진 이들 개화파들의 이후 행적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3일 천하로 끝난 그 날, 홍영식(洪英植)은 현장에서 반대파에 피살된다.
그러나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재필(徐載弼)은 일본 망명이라는 혈로를 뚫는다.
먼저 김옥균, 일본에서 10년을 전전한 후 재기를 노려 1894년 상해로 건너갔다가 홍종우에게 암살당한다.
시신은 당시 서울에서 가장 번화가였던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된다.
그리고 이듬해에 명예 회복된다.
그러나 박영효는 김옥균이 살해당한 그 해 귀국, 내부대신이 되었다가 다시 일본으로 2차 망명한다.
1907년 사면되고 이완용 내각에서 궁내부 대신을 지낸 후 한일합방 이후에는 일본으로부터 작위까지 받는다.
한편 일본 망명이 여의치 않아 다시 미국 망명을 택한 서재필은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역시 10년 만에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한다.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도 세운다.
그러나 외국인이라고 배척받아 다시 도미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1947년에는 과도정부 최고 정무관이 되었지만 48년 또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의사로서 88세의 천수를 누린다.
하나의 이념 바구니에서 나온 인물들이 이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산화된 사례는 아마 세계사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위로부터의 개혁'의 결과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아래로부터의 개혁(bottom up)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왕에게서부터 주권을 뺏기 위한 농민들 주도의 철저한 '아래로부터의 개혁'이었다.
당시 개혁파의 리더는 서른 세 살의 젊은이 로베스피에르. 그는 처음에는 비교적 중도파였으나 혁명이 진행되면서 색깔이 달라졌다.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보낸 후 혁명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어느 정도의 공포정치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서슬 퍼런 공안위원회를 조직, 반대파 처형에 나선 것이다.
파리에서 만도 약식재판을 받고 사형 당한 자가 5천명을 넘었다.
결국 좌우 양파의 보스인 '당통'과 '에베르'까지 처형한다.
내부논쟁을 허용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시점에 이처럼 초강수를 둔 것이다.
몇 달 후 로베스피에르는 '독재 타도'를 외치는 반대파에 체포돼 이튿날 바로 처형당한다.
다시 온건파가 실권을 쥐게되면서 프랑스는 나폴레옹 시대로 넘어간다.
물론 먼 훗날 민주주의의 산실로 인정받지만 프랑스혁명은 당시에는 분명 '죽 쒀 개 준 혁명'이었다.
◇ 개혁과 독재는 종이 한 장
과연 무엇이 개혁인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 개혁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가. 그렇다.
우리는 지금 엄청난 개혁의 와중에 있다.
이 땅에 선거제도가 도입된 이래 이번 총선처럼 깨끗하게 선거를 치른 적이 있는가.
'선거 특수'는커녕 오히려 평상시보다 못하다는 푸념이 나왔지만 우리는 내심 흐뭇해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혁명적인 대전환이다.
이것이 바로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제 자칭 개혁파들에게 칼자루가 쥐어졌다.
국민들 대부분도 '더 바뀌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혁과 독재는 종이 한 장 차이. 아무리 이념적으로 옳은 개혁이라도 상대방을 무시하는 밀어붙이기 식이라면 그것이 바로 독재가 아닌가.
그리고 개혁 뒤에는 반드시 반(反)개혁이 따른다.
한반도에서 모처럼 일어난 서기(瑞氣),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죽을 쑤지 않기 위한 '위로부터의 개혁' 제 2라운드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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