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詩와 함께 하는 오후

소나기 한차례 지나가고

과일 파는 할머니가 비를 맞은 채 앉아 있던 자리

사과궤짝으로 만든 의자 모양의 그림자

아직 고슬고슬한 땅 한 조각

젖은 과일을 닦느라 수그린 할머니의 둥근 몸 아래

남몰래 숨어든 비의 그림자

자두 몇 알 사면서 훔쳐본 마른하늘 한 조각

김선우 '비에도 그림자가 있다'

고슬고슬한 땅 한 조각의 질감으로 비의 그림자를 읽었다면 그대의 시 읽기는 하품이다.

할머니의 둥근 몸 아래 남몰래 숨어든 비의 그림자가 육이오 때 죽은 영감이거나 어느 새벽 문득 지프에 실려간 뒤 아직도 소식 없는 유복자이리라고 읽었다면 그대의 시 읽기는 중품이다.

그대의 시 읽기가 진정 상품이려면 마른하늘 한 조각이 왜 할머니의 몸인지를 눈치채야 하고 그것을 훔쳐보는 부끄러운 눈빛들이 비의 그림자임을 지체없이 알아야 한다.

강현국(시인.대구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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