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나는 바람 타고 씨가 날아와 생겨난 소나무였다…〈중략〉…시원스럽게 선조들의 한을 풀고 따뜻한 봄날을 회복하니 그때 나는 임금님의 은혜를 흠뻑 받은 늙고 큰 소나무였다.
한편 조상의 산소를 깨끗이 정돈하면서 추모의 정을 이기지 못한 그때에 나는 조상의 산소에 부슬부슬 내리는 눈이었다'. 파란만장한 생애의 여장부이자 조선조 마지막 궁중 여류시인이었던 최송설당(崔松雪堂, 1855~1939)은 '송설당기'에서 자신에 대해 이렇게 썼다.
1901년 조선조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생모로 고종을 가까이 모시던 엄비와 친분이 두터워 가문의 누명을 벗겼던 사연의 한 부분이다.
▲철종 6년 아들 없는 집안의 맏딸로 태어난 그는 역모에 연루돼 입은 가화를 설원할 수 없다고 한탄하는 아버지에게 7세 때 이미 그 부흥을 약속할만큼 총명했다.
가문의 명예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삯바느질까지 하면서 재산을 모았다.
40세 때 상경해 엄비와 가까워진 뒤 고종의 특명으로 누명을 벗긴 뒤 곳곳의 조상들 산소에 비석을 세우고 일가친척에게 전답을 나눠주는 등 가문을 일으켰다.
▲말하자면 몰락한 집안을 부흥시키고 조상의 원한을 풀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영친왕의 보모가 된 뒤 황실 부와 권력을 거머쥔 뒤 소원을 성취한 경우였던 셈이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민족교육의 선각자였다는 점이다.
1930년 김천고보(현 김천중고) 설립에 전재산 32만2천1백원(지금 돈 45억원 정도)을 내놓았으며, '사학을 경영해 민족 정신을 함양하라'는 유언을 남겼던 여장부였기 때문이다.
▲최근 송설당의 한시와 국문가사 등을 담은 '송설당의 시와 가사'(창비 펴냄)가 출간돼 화제다.
2, 3세에 글자를 익히고 6, 7세에 시인의 자질을 보인 그는 입궐한 이후 당대의 권력자.지식인들과 교우하면서 왕성하게 창작, 한시 258수와 가사 50여편 등을 남겼다.
1922년에는 '송설당집'을 발간, '폐허' '백조' 등 현대시 동인지들이 유행하던 시절에 궁중문학을 지킨 마지막 세대 작가로 꼽히고 있으며, 이번에 완역 출간됨으로써 재조명에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우뚝 마당 구석 한 자 남짓한 돌/삐죽이 바짝 마른 것이 타고난 모습 그대로/그윽한 곳에 숨겨져 안개의 보호를 입어/속세 힘있는 사람도 두렵지 않다'. 한시 '괴석(怪石)의 한글 번역으로 그를 읽게 하는 대목 중의 하나다.
충효를 다한 여장부, 교육의 선각자로서뿐 아니라 문인으로서의 재조명은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는 26일에는 성균관대에서 '최송설당의 삶과 민족교육, 그리고 문학'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도 마련되는 모양이다.
그의 문학을 통한 새로운 빛을 기대해본다.
이태수 논설위원
댓글 많은 뉴스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TK를 제조·첨단 산업 지역으로"…李 청사진에 기대감도 들썩
김민석 "벌거벗겨진 것 같다는 아내, 눈에 실핏줄 터졌다"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트럼프, 중동상황으로 조기 귀국"…한미정상회담 불발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