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혀가 길면 손이 짧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말은 부도수표와 같고 의식적인 거짓말은 위조지폐와 같다.

따라서 정치인과 군인의 말은 보증수표와 같아야 한다'.

어느 성직자가 하신 말씀이다.

정치인이나 군인만이 아니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 안에서 타당한 약속이나 옳은 규칙이 지켜지지 않을 때 그 사회는 반드시 붕괴된다.

세계 역사상 개혁과 혁명을 이유로 과거의 약속과 규칙을 무차별적으로 고치고 깨뜨린 것 중 가장 코미디 같은 약속 파기는 모택동 홍위병의 '신호등 바꾸기'였다.

(-기네스북 선정.세계사의 대실수-)

과거의 생각, 과거의 문화, 과거의 관습, 과거의 습관 이 4가지를 '낡은 4대 구악'으로 규정하고 모든것을 바꾸기 시작했던 홍위병은 마침내 네거리 신호등의 진행과 정지, 규칙(약속)까지 거꾸로 바꿔버렸다.

빨간색이야말로 '진보'의 상징이므로 녹색신호때 진행하는 것은 '반동'이라는 이유였다.

갑자기 길거리 차들이 신호등에 빨간색이 들어올 때 달리고 녹색불이 켜지면 서야했다.

보행자도 빨간불이 켜질때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질서붕괴가 일어났다.

정신나간 신호등 개혁은 한술더떠서 '혁명적인 것은 좌측'이라며 오른쪽 차로로 달려왔던 차들에게 갑자기 왼쪽 차로로 달리도록 명령했다.

교통사고가 빈발했지만 홍위병부대의 '바꿔! 바꿔!' 분위기에 눌려 어이없게 차에 치여 죽어가면서도 아무도 과거의 규칙이라도 타당한 규칙(약속)은 지켜야 되지않느냐는 항변을 할 수 없었다.

어처구니 없는 약속을 말들어내도 군소리없이 따라야 하거나 하루아침에 약속과 규칙을 뒤집어버려도 그만인 공동체라면 그것이 국가든 동창회 모임이든 모래알 같은 조직체로 무너진다.

당연히 홍위병의 문화혁명도 철저히 실패하고 붕괴됐다.

행정수도 이전문제를 두고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투표 발언이 '타당한 약속'이냐 '약속 파기'냐는 시비도 결국 끌면 끌수록 국론만 모래알이 되는 사안이다.

솔직히 1년 사이에 똑같은 수도이전을 놓고 세번이나 이런말 저런 코멘트를 하느라 앞뒷말이 서로 얽히고설킨 구석도 없지 않고 야당도 그런 허점을 '모순된 약속파기'로 몰아 공격하고 있으니 나라안이 끝없이 갈라지고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말이란 너무 여러갈래 자주 하다보면 나중에는 지난번에 무슨 말을 했었는지 헷갈리고 기억이 없어지는 바람에 앞말과 엇갈리는 말을 하게 되기가 싶다.

국민투표 관련발언이 약속파기냐 아니냐는 논란은 정치권이 알아서 국민앞에 밝혀내고 설득시킬 시빗거린 만큼 일단 접어두자.

단지 앞으로 한미 안보와 경제회복, 국가부채, 파병 등 국정과제가 산적한 난국상황에서 정부와 외국, 지도자와 백성, 백성과 백성끼리의 약속들이 홍위병의 신호등 바꾸기처럼 함부로 뒤집어지고 불신과 분열이 생겨서는 안된다는 것만은 인식하자.

'혀가 길면 손이 짧다'는 속담처럼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현란한 토론이나 매끄러운 말이 아니라 묵묵히 행동하는 실행력이다.

한미동맹, 탈북자외교, 의료대란, 아파트 원가공개 등 드러난 국정현안들만 두고봐도 치고받는 말들만 회오리바람에 날리는 휴지조각 마냥 공중에 어지럽게 떠돌고 뭣하나 똑부러지게 성사되고 매듭지어지는 일은 없음을 본다.

통치권자의 권위와 리더십은 입술에서가 아니라 명쾌한 결단력의 실행(손)으로부터 나온다.

"계급장 떼고 붙어보자"는 식의 질서 붕괴가 나타나는 것도 권력 상층부에 그런 권위가 잘 안보인다 싶으니까 그런 것이다.

국민 세금은 두배나 올랐고 LPG.지하철 요금은 한참에 20~40%씩 오르는데 국민투표하겠다 말겠다 말 시비에만 올인하고 있고서는 민심이 맘 편안하게 흐를수가 없다.

지금 대다수 국민들은 혀만 긴 스타일의 지도자보다는 혀는 좀 짧아도 뭔가 일을 쳐낼줄 아는 손이 긴 지도자의 '부활'을 바라고 있다.

김정길(명예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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