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부터 내내 마음이 힘들다.
이 땅의 누구라도 그러할 것 같다.
가슴 저 밑바닥에 슬픔의 강물이 흐르기라도 하듯 '김선일'이란 이름을 보거나 듣기만 해도 울컥거려지곤 한다.
한 낯선 청년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그의 절규가 환청처럼 귓가에 맴도는 판에 세 끼 따슨 밥 먹는 것도 미안하고 편안히 잠자리에 드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지난 월드컵대회때는 환호성이 방방곡곡을 휘감았지만 이번엔 슬픔과 분노가 우리들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헝클어진 머리, 옷자락이 눈물에 젖은 채 통곡하는 고인의 여동생 모습에선 슬픔의 극치를 보는 듯했다.
확실히 슬픔 앞에서 우리는 직설적이다.
비통함을 못 이겨 혼절하기도 하고, 목이 쉬도록 대성통곡하며, 멍이 들도록 몸부림치기도 한다.
곡읍(哭泣: 통곡하며 우는 울음)이며, 제읍(啼泣: 소리높여 우는 울음)이며, 체읍(涕泣: 눈물을 흘리며 우는 울음)이며, 호읍(號泣: 목놓아 소리내어 우는 울음)이다.
흔히 검은 선글라스로 눈을 가린 채 고상한 모습으로 슬픔조차 절제하는 서양사람들과는 많이 다르다.
한 지인의 말이 생각난다.
브라질의 공항에서 어느 한국인 이민자 가족의 이별장면을 보게 됐다고 한다.
가장이 미국으로 가게 됐다는데 아들과 헤어지게 된 노모가 두 다리를 뻗고 땅바닥을 치며 한국식으로(?) 대성통곡하더라는 것이다.
주변 외국인들의 호기심에 찬 모습을 보면서 약간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더라고 말했다.
그땐 "맞아, 우린 좀 나이브해"라며 공감했지만 그 생각은 이번에 바뀌었다.
가슴을 저미는 깊은 슬픔 앞에 목놓아 방성대곡한들, 남들이 촌스럽다며 비웃는들 그게 대수랴. 큰 슬픔은 슬픔으로만 달랠 수 있거늘….
손에 손에 들린 추모의 촛불, 그리고 내 가족의 일처럼 멀리서 가까이서 달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 사회가 아직은 살 만한 곳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시내버스 옆구리에 커다랗게 적힌 시구가 가슴에 와닿는다.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정호승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중). 비통해 하는 이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 그들이야말로 이 사회를 지켜주는 산소같은 사람들 아닐까. 곡절많은 6월도 끝나간다.
아주 오랫동안, 이 6월의 슬픔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전경옥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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