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 씨의 죽음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없고 애통하다.
그를 구출하지 못한 정부의 무능, 특히 외교통상부의 몰지각한 대응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감사원의 감사와 국회의 국정조사가 예정돼 있는 만큼 장관과 관계공무원에 대한 응분의 조치가 곧 뒤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책임소재가 모두 추궁되었다고 하겠는가?
아니다.
적어도 두 곳의 책임이 더 거론돼야 한다고 본다.
첫째는 언론이다.
김선일씨는 피랍된 후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그의 신분이나 이라크 입국목적에 대해 '아랍어 현지연수' 나 '단순한 통역 전업(專業)', 아니면 '한-이라크 문화교류'라는 등으로 추상적인 답변을 했을 수 있다.
또 미군부대 접근에 대해서도 '반미활동 자료수집'을 위한 것으로 해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자신이 미군부대에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회사의 직원이라고 하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설사 그런 추궁이 있었다 하더라도 강하게 부인했을 수 있다.
시인은 곧 죽음을 의미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김선일씨 납치사실이 공표된 6월21일의 한국 언론은 어떠했는가? 모든 신문 방송이 한 치의 주저도 없이 그가 가나무역이라는 미군 군납업체의 직원임을 까발려 보도했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이런 보도를 한 언론도 몇몇 있었다.
"그는 목사 지망생이다.
중동지역에서 기독교 선교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랍어를 공부했다".
이렇게 공개된 사실에 납치범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군사적으로 미군을 돕는 것 외에 종교적인 차원에서도 이슬람의 붕괴와 약화를 노린 이 사람이야말로 죽여 마땅하다는 결론을 내지 않았을까?
두 번째는 민간단체의 행태이다.
피랍사실이 공표된 바로 그 21일, 참여연대 등 365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이라크 파병반대 비상국민행동'은 청와대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이라크에 대한 파병 중단을 촉구했다.
국민행동은 이어 23일부터 국회 앞에서 농성을 벌이는 한편, 30일에는 서울 광화문에서 대규모 집회도 벌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민행동측은 "23일 파병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과 함께 '이라크 추가 파견 중단 및 재검토 결의안'을 발의할 예정인 만큼 이에 맞춰 농성에 돌입할 것"이라며 "추가파병 반대여론을 확산시키기 위해 의원 면담 등의 활동도 벌여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상은 모두 21일 하루에 공표된 파병반대운동 일정표다.
필자가 왜 이날 하루의 기사에 주목하는가 하면 실제로 이날 기사들이 김선일씨 조기(早期) 피살에 영향을 끼쳤을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납치범인 이라크 저항세력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보자.
김선일씨가 "나는 살고싶다"며 절규하는 비디오테이프를 방영(알 자지라 방송 경유)한 이후의 한국 상황을 보니 파병 반대론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다- 그러니 김씨를 이 시점에 참수해서 그 불길에 기름을 부어 보자- 그들로서는 쉽게 이런 결론에 닿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다가 우리는 이렇게 무능한 정부에 생각 없는 국민이 되었을까? 지난 4월 이라크에서 2번의 피랍 사태를 겪은 일본인이 모두 무사히 풀려났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부끄러움이 더 깊어진다.
양자의 경우 똑같이 '파병 철회'를 요구하며 납치극이 벌어졌고 해당국은 '파병 강행'을 밝혔지만 한국과 일본인 인질의 운명은 정반대였지 않은가. 납치 세력의 성격이나 피랍자의 신분 등에서 차이점이 있다고는 하나 모두 같은 나라에서 당한 일이다.
일본의 피랍자 3명이 이라크에서 귀국했을 때 그들은 공항에서 "너희는 납치 사건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너희는 일본인의 수치다"라는 비난의 구호를 들어야 했다.
또 인터넷 게시판에는 그들을 심하게 모욕하는 글들이 수없이 올라왔다.
어느 국회의원은 "그들을 구조하는 데 국민의 혈세를 사용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낀다"고 했으며 몇몇 언론은 구출비용 일부를 그들에게 물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아아! 우리 김선일 씨도 보다 유능한 정부와 사회 각계의 사려 깊은 행동으로 구출되고, 귀국해서는 슬픈 오열이 아닌 따가운 질책을 받는 주인공이 왜 될 수가 없었을까.
최재욱 전 환경부장관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