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오후 8시30분 대구 대명동 스튜디오 Just . 육중한 방음문을 열자 쿵쿵거리는 드럼소리가 스튜디오 안을 감쌌다.
드럼 앞에 앉은 것은 허성은(대구경신고1년)군. 누가 문을 열었는지도 모른 채 연주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마에 배인 땀은 이미 목줄기를 넘어 가슴과 등을 축축히 적시고 있었다.
세계 최고의 드럼 주자라는 꿈을 키우며 날마다 내일의 문을 두드리는 성은이. "드럼 세트 앞에 앉아 있는 순간만큼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다"고 말한다.
#보물1호...스틱 두개
이처럼 자유로울 수 있을까. 가느다란 막대기 두 개만 있으면 세상이 행복하게 보인다는 성은이. 그의 보물 1호는 드럼 스틱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두드리고 싶다고 했다.
스틱을 처음 잡은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대구교대 안동부설초등학교 교사이던 아버지가 학교 관악부 지휘자를 맡으면서부터다.
성은이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관악부에서 타악기를 연주했다.
스틱은 아버지가 건넨 선물인 셈이다.
"스틱과 북이 닿아 만들어내는 갖가지 리듬이 좋았어요." 두드릴 수 있는 것은 스네어 드럼(작은 북)뿐이었지만 매일같이 연습을 했다.
중학교 때는 학교에 밴드부가 없었지만 이미 타악기의 경쾌한 리듬에 빠져버린 상황. "고교 밴드부를 기웃거렸죠. 형들이 귀엽다며 가끔씩 드럼을 칠 수 있는 기회를 줬어요."
교회도 찾아다녔다.
드럼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즉흥 연주를 하면서 실력도 많이 나아졌다.
자신감도 붙었다.
고교에 진학해서는 신입생이면서 밴드부 드럼을 꿰찼다.
스틱은 그렇게 둘도 없는 보물이 됐다.
#연습...노력
음악적 소질은 타고난 것 같다고 했다.
학교 관악부 지휘자인 아버지, 어머니도 성악가 출신이다.
드럼을 치기 전에는 바이올린을 오랫 동안 켰다.
하지만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소질보다 연습이 우선이라고 잘라말했다.
만족할 수 있는 음을 찾기 위해서는 똑같은 리듬을 수십, 수백 번 반복해서 두드려야 한다.
얼마 전에는 투스트로크(스틱으로 스네어 드럼을 두 번씩 튕기는 것)를 완성하기 위해 며칠 동안 이것만 연습했다.
드럼 스틱을 잡은 지 벌써 7년. 그러나 아직 자신의 실력이 만족스럽지 않다.
둔탁하지만 한없이 변화무쌍한 박자들을 두루 섭렵하기 위해 아직은 좀 더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드럼을 친다는 것은 겉보기처럼 그렇게 화려하지만은 않은 일이다 . 관객들 앞에 서기 위해서는 그 만큼 피맺힌 노력이 따라야 한다.
"해답은 연습뿐이죠." 여름 방학인 요즘 성은이는 하루 5시간 이상씩 드럼 세트 앞에 앉아 있다.
#꿈을 향한 질주
아직은 천진한 미소가 어울리는 성은이. 하지만 드럼 앞에 앉자 표정은 한없이 진지해졌다.
아니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는 듯한 얼굴이다.
음악에 취해, 음악과 하나된 것 같았다.
성은이는 '스티브 스미스' 같은 창의적인 드러머를 꿈꾼다고 했다.
정형화된 리듬보다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싶다는 욕심도 숨기지 않았다.
"화려하고 요란한 드러머보다는 사람들에게 평온함을 줄 수 있는 악사가 되고 싶어요."
그러나 꿈을 이루는 길이 순조로울 수만은 없다.
가장 큰 문제가 학교 공부. 고교에 진학하면서 성적이 떨어지자 스틱을 건넸던 부모님도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다.
스스로도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해내지 못하면 꿈의 문턱조차 밟아볼 수 없다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최근엔 더 버거워졌다.
학원을 오가며 클래식 타악기를 배우고 있는 것. 대학 진학을 위해 스네어드럼, 마린바, 팀파니 등의 타악기를 다루고 있다.
전문 음악인이 돼 누구 앞에서든 떳떳하게 드럼을 치고 싶은 것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더 좋아할 고교 1학년생에겐 빡빡한 삶이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부모님께 내미는 절충안이자 미래의 계획서이다.
드러머에 대한 사회적 편견, 어른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 대한 부담을 덜기 위한 방책이기도 하다.
"음대에 진학해서 음악이 무엇인지, 연주가 무엇인지 제대로 수업을 받고 싶어요. 취미로 달려든 일이 아닌 이상 실력을 갖추는 것만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길이겠죠."
성은이는 지난해 기술 선생님이 해 준 말씀을 내내 가슴에 담고 산다고 했다.
"행복을 추구하면서 사는 삶이야말로 아름답게 세상을 사는 법이라고 하셨어요. 제 소리를 찾고, 저만의 연주를 찾아가는 길이 제게는 아름답게 세상을 사는 방법인 거죠."
다시 드럼 세트 앞에 앉아 자신의 보물 1호를 거머쥐는 성은이의 손에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 담겨 있었다.
글.최두성기자 dscho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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