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가끔 여우비가 내릴 때면 햇빛과 비 사이에 서고 싶었다. 왼팔은 볕에 두고 오른팔은 비에 두고서 그 여우비 끝에 무지개 걸린 하늘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세상의 모든 것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가면서 여우비의 경계를 보고싶은 꿈은 아득한 것이 되었고 잊혀져 버렸다.
그 오랜 여우비의 꿈이 네팔로 들어오는 길에 있었다. 올드 팅그리(Old Tingri: 老定日)라는 마을에서 장무를 거쳐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 길은 회색과 녹색의 경계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해발 4,390m에서 오로지 회색뿐인 구름 위를 달리던 지프는 어느 순간 작은 나무들을 껴안은 협곡으로 빠져들며 이내 짙푸른 녹음으로 다가선다. 아득한 낭떠러지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수백 갈래의 폭포는 생명의 환희를 보여주듯 찬란하다. 아마도 여우비의 경계가 이런 것이리라. 자연의 척박함과 풍요로움의 경계, 나라를 잃고 떠도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마음이….
살아 있는 신들을 모시는 나라,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로 가는 길은 용을 쓰게 할 만큼 험한 길이었지만 이렇듯 어린 날 여우비의 꿈을 깨우며 다가온다.
"며칠 전에 반군의 공격으로 7명이 죽었어요." 룸비니로 가는 교통편을 묻는 말에 한국 식당 주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한다. 그는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판에 웬 놈의 부처냐는 표정이다. 그것도 혼자 로컬버스로 반군이 수시로 출몰하는 길을 떠나겠다고 나서는 여행자를 그는 마치 세월 잘 만난 철부지 취급이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2천300만 인구 중에 겨우 5%가 불교도인 네팔에서 부처의 탄생지는 사람들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고 너무 외진 곳에 있다. 더구나 전 세계 배낭 여행객들이 마지막으로 모여드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는 여행자들에게는 날이 새면 그저 어슬렁거리다가 밤이면 질펀한 술판에 취하는 휴식의 공간이다.
"반군의 총에 맞아 죽는다면 그것도 인연이고 업이지요!" 불쑥 내뱉은 말에 그는 기껏 걱정해 주었더니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다. 어색한 침묵을 뒤로 하고 뉴 버스 파크(New Bus Park)로 향한다. 비에 흠뻑 젖은 터미널은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손저울을 든 과일장수와 비닐을 뒤집어쓰고 선글라스를 파는 아이들이 처마 밑에 엉켜 있다. 매표소에는 영어로 된 안내판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오전 6시 30분에 떠나는 하루에 한 대 뿐인 룸비니행 버스를 예약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카키색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무리지어 서 있다. 살아있는 신이라는 갸넨드라 국왕을 지키는 군인들의 표정은 비를 뿌리는 짙은 회색 하늘만큼이나 어두워 보인다.
왕정과 반군의 대립, 네팔 국민들이 처한 최근의 역사는 비겁하고 뻔뻔한 역사의 점철이다. 2001년 6월 1일 오후, 네팔 왕궁에서 총격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디펜드라 왕세자가 혼사 문제로 비렌드라 국왕부처와 말다툼 끝에 소총을 난사해 국왕부처를 비롯한 왕족 13명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왕권을 찬탈하기 위해 현 국왕인 갸넨드라의 음모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있다.
권력을 빼앗기 위한 골육상쟁의 추악한 음모가 21세기 네팔 왕정의 현주소다. 거기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무능하고 부패한 왕정을 지원하는 중국의 태도에 있다. 2002년 7월 10일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을 방문 중인 갸넨드라 네팔 국왕에게 반군(叛軍) 소탕 지원을 약속했다. 장 주석이 소탕전 지원을 약속한 '무장반군'은 '마오쩌둥(毛澤東)주의'를 추구하는 네팔 내 공산반군이다. 마오이스트로 불리는 반군들은 마오쩌둥이 전파했던 사회주의 정치철학과 노동자'농민 중심의 혁명이념을 100% 수용한 세력이다.
지난한 세월 속에서도 마오쩌둥은 중국의 이웃 네팔에 살아 있다. 시대에 역행하는 완전한 왕정복귀를 주장하는 부패한 왕정과 중국을 혁명으로 이끌었던 마우쩌둥을 따르는 마오주의자들, 중국의 선택이 왕정이라면 이것은 아이러니가 아니라 배신이다. 여행자에게는 특정 세력을 지지할 마음은 전혀 없다. 또한 그럴 처지도 아니다. 다만 현 중국 지도자들이 네팔의 마오이스트를 '마오 주석 교시에서 벗어난 반(反)혁명분자'라고 말하지만 노동자 농민 위에 신으로 군림하려는 자를 지원한다는 것 자체가 반혁명이 아닌가? 티베트에서, 네팔에서 스스로를 부정한 중화제국주의의 깃발은 이렇게 부끄러움을 모르고 펄럭이고 있다.
새벽에 출발한 룸비니행 버스는 프리티비 하이웨이를 위태하게 달린다. 명색이 고속도로지만 중앙분리대는커녕 중앙선조차도 없는 길이다. 더구나 중부 산악지대를 통과하는 도로는 수십m의 낭떠러지를 끼고 있는 데다 폭우에 수시로 매몰되어 버스는 오랫동안 꼼짝도 못하고 서 있다. 계곡 곳곳의 계단식 밭에는 가난이 키운 옥수수가 한창이다. 옥수수 수확에 매달려 있는 아이들의 슬픈 눈망울과 여인의 등에 매달려 잠든 어린아이의 눈물 마른 얼굴이 아프다. 산악지대를 통과하자 마을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지나가는 차량의 통행료를 받는다.
바리케이드는 원래 마오이스트들이 네팔 정부에 압력행사를 하기 위해 기름을 넣고 달리는 모든 차량의 통행을 금지시키는 '번다' 즉 총파업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도시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통행료를 받는 구실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래저래 선택의 여지가 없는 네팔 국민들의 현실은 가혹하다. 수십 번의 검문을 받는다. 현지인들은 짐을 모두 들고 내려 군인들의 수색을 받고 나서야 다시 차에 오른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검문에서 제외되기는 했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우리에게도 이런 세월이 있었다.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지는 않았지만 신의 권력을 휘둘렀던 장군들의 시대는 사람들을 발가벗기고 어둠으로 내몰았다. 결국 민중의 힘은 그 신의 권력을 무너트렸지만 역사는 그들을 단죄하지 못했다. 누구를 위한 권력이냐는 문제를 놓고 볼 때, 왕정은 정당성을 잃는다. 하지만 마오이스트조차도 이념이 아니라 다수를 위한 권력이 되지 못한다면 설 땅이 없어 보인다. 동기가 아무리 옳다하더라도 과정이 불순하다면 그 동기는 인정받지 못하기 마련이다. 카트만두를 떠난 지 12시간 만에 겨우 룸비니 근처의 버이러허와(Bhairahawa)에 닿는다.
분명히 예약한 표는 룸비니행이었지만 운전기사는 이곳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타라고 말한다. 유리창조차 없는 버스에서 한나절을 꼬박 먼지에 시달린 터라 다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내린다. 외국인이라고 해봐야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외진 곳이다. 몇 번을 다시 물어 탄 버스는 30분을 달려서 여행자를 이미 어둑해진 룸비니 정원에 내려놓는다.
숨겨진 낙원이 아닌 인간의 땅, 룸비니는 붉은 노을 사이로 눈썹처럼 짙은 어둠을 깔고 별보다 앞서 반딧불이를 피워 올리고 있다. 사원 지구에 있는 한국 사원인 대성 석가사의 규모는 인도 부다가야의 고려사와는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하다. 절집의 크고 작음이 무슨 상관이 있으랴만은 불국토 룸비니에는 어울리지않아 보인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서둘러 부처의 탄생지인 성원지구(聖園 地區: Sacred Garden Zone)로 향한다.
매표소를 지나자 아소카 왕이 세웠다는 석주가 빛바랜 세월 속에 우뚝하다. 기원전 249년 부처의 탄생지를 순례하고 주민의 조세를 면제했다는 내용을 담은 비문은 룸비니를 전설에서 역사로 끌어올렸다. 그 역사 뒤로 마야 템플이 세워져 있고 내부에는 부처의 탄생지를 유리관으로 보존하고 있다. 마야부인이 산기를 느껴 붙잡았다는 보리수와 출산을 앞두고 목욕을 했다는 연못이 긴 세월의 흔적 속에 허허롭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삼계 개고 아당 안지(三界 皆苦 我當 安之)"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 3계가 다 고통이므로, 내 마땅히 이를 편안히 하리라." 부처의 오신 뜻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여행자의 불경(不敬)일까? 지지리도 모질고 끈질긴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을 향해 일곱 걸음을 걸은 부처와 칠일 만에 세상을 떠난 마야부인 사이에 7이라는 숫자의 인연은 무엇일까? 열여섯의 나이에 얻은 아들의 이름을 "장애(라훌라)"라 짓고 스물아홉의 나이에 출가한 부처에게 어머니는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행여 누리던 것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은 생모의 애절한 붙잡음이 없었던 까닭은 아니었을까?
병든 노모를 핑계로 출가를 포기하고 산을 내려와야했던 여행자로서는 고뇌를 뿌리쳤던 부처보다는 번민 속의 부처가 더 도탑다. 절집을 찾으면서 한번도 소원을 빌지 않는 것도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부처를 먼저 보기 때문이다. 이는 신앙을 가슴에 품지 못하는 메마른 영혼 탓인지도 모른다.
부처가 출가하기 전까지 지낸 틸로우라코트(Tilaurakot)는 폐허가 된 탓인지 가는 길조차 쓸쓸하다. 아마도 부처는 자신이 설법한 인생무상처럼 그 왕궁이 짐승들의 쉼터가 될 것을 예견했는지 모른다.카트만두로 돌아오는 길, 옥수수를 등에 가득 짊어진 모녀가 고속도로를 하염없이 걷고 있다. 얼핏 그들의 모습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느낀다. 아! 길은 사람을 키우고 가르치고 사람은 길에서 자라고 배운다.
사진: 룸비니 정원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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