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윤리가 사라진 시대의 미술

좋은 사람이 좋은 그림을 그리고, 나쁜 사람이 좋은 그림을 그렸다는 사례가 생겨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근년 들어 세계미술의 흐름을 볼진대 그렇지만은 않은 이상한 징조들이 있어서 나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있다.

자고로 예술이란 것은 진리탐구의 중요한 일환이었다.

예술이 종교와 아주 가까운 사이로 인류의 행복의 증진에 기여해온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종교 예술 철학 과학이 모두 따로따로 분리되고 서로간에 상관이 없는 각각의 분야로 독립되었다.

가치에 대한 모든 탐구활동은 아주 극단적으로 세분화되고 있다

쉬운 예를 하나 들자면 종합병원의 조직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눈 전공, 코 전공, 피부전공, 간 전공, 위 전공… 등등 한없는 세분화현상을 볼 수 있다.

세분화의 연구가 좋은 점이 있는 반면에 전체를 보는 기능을 잃는다는 데에 아쉬움이 있다는 말이다.

오늘날의 예술활동에서 그러한 징조를 보면서 좋은 사람이 좋은 그림을 그린다는 나의 예술사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에 대해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개성적인 것을 찾아라! 새로운 것을 찾아라! 따라서 이른바 점잖은 것 같은 그림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가 없게 되었다.

난폭한 그림, 충격적인 그림, 괴상한 그림 등 어찌되었거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은 저만치 제쳐놓고 이상한 것, 그런 아이디어를 찾는 데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젊은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미국의 피츠버그시에는 마릴린 먼로를 그려서 유명한 앤디 워홀 미술관이 있다.

그가 왜 그런 그림을 그리게 되었나 하는 젊은 시절의 자료들을 잘 보관전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동성연애자였고 그런 관계로해서 친구의 권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서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문제는 그 사람뿐만 아니라는 데에 더욱 놀랐다.

유럽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고 우리나라에도 그런 일이 생겨나고 있다는 데에 씁쓸하다 못해 슬픈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림의 형태가 충격적일 뿐만 아니라 예술가의 삶이 종래의 상식을 뛰어넘고 있다는 데에 무어라 말이 안 나온다는 것이다.

예도(藝道)라는 말은 사전에나 있는 단어가 되고 있다.

훌륭한 사람이 훌륭한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 석굴암조각을 만든 사람은 틀림없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나의 생각을 바꿔야 된다는 말인가. 얼마전 미국의 대통령선거전에서 이슈가 되었던 것 중에 동성결혼, 낙태문제 등이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많은 미국사람들이 그것을 반대하는 쪽에다 표를 주었다는 뉴스를 보고서 이건 또 무슨 소식인가 하고 의아해지는 것이었다.

윤리라든가, 도덕이라든가 하는 사전적인 단어가 인간의 가슴 깊은 데에서 살아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리하여 그것을 건드리면 깨어난다는 뜻이 아닌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는 원초의 에너지가 변함 없이 살아있다는 뜻이 아닐까.

인간세상에서 삶의 철학이라는 것이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은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2천년전 사람과 오늘날의 사람이 얼마나 변화했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달라진 것보다 달라지지 않은 것이 절대적으로 많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외모도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고, 사람의 심성이란 세월이 간다해서 변하는 것이 아닌 성싶은 것이다.

다치면 아프고 헤어지면 섭섭하고 죽는 게 두렵고 하는 것, 그 원초적인 것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것은 지극히 표피적인 현상이 아닐까.

예술은 끊임없이 변화하여 왔다.

그것은 인간이 시간 속에서 살고있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것은 외적인 현상이지 근본은 변화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그림들이 요동치는 모습을 하게 되는 것은 외적인 현상이 특별히 강조되는 때문이 아닐까. 바다가 파동 친다고 해서 바다자체가 변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좋은 사람이 좋은 그림 그린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최종태 서울대 명예교수·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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