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김장했어요?" "아니" "그럴 줄 알고 김치 쬐끔 덜어놓았어요." 손아래 친구가 김장을 했다며 전화를 해왔다. 그녀가 건네준 통에 소담스레 담긴 별미김치는 네 가지나 됐다. 혀가 아릿한 파김치에 고춧잎 넣은 무말랭이김치, 깻잎김치, 요즘 보기 드문 콩잎김치까지.
해마다 이맘때면 몇몇 지인들로부터 '김치 전화'가 걸려온다. 올해도 이래저래 반강제적으로(?) 얻은 김장김치가 꽤 많다. 더러는 사양을 했으니 망정이지 주는 대로 받았다간 냉장고 전체가 김치로 꽉 찰 판이다. 냉장고 문을 여닫을 때마다 김치냄새가 진동을 하지만 마음은 부자인 양 넉넉해진다. 집집의 손맛 따라 모양도, 맛도 제각기인 김치들 속에서 '포옥 폭' 익어가는 정(情) 때문이리라.
우리 먹을거리 중 김치만큼 정겨운 추억을 지닌 것도 없을 듯하다. 살찐 통배추와 말괄량이 종아리 같은 무들을 잔뜩 실은 트럭이며 리어카가 거리를 쉴 새 없이 오갈 때면 아이들은 괜스레 마음이 들떴다. 시장통 장바닥은 김장감들로 온통 시퍼랬고, 물크러진 배춧잎 냄새마저 왠지 흥겹게 했다.
마당 가득 부려놓은 배추며 무를 자르고, 소금에 절이고, 씻느라 엄마들은 두 손이 오리발처럼 발개지도록 수돗가를 떠나지 못했다. 양념을 버무릴 땐 이웃집 아지매'할매들도 함께 거들었다. 옆에서 알짱거리노라면 매콤한 양념에 버무린 배추 속고갱이가 입에 쏙 들어오곤 했다. 눈물이 찔끔 날만큼 맵던 그 맛의 기억. 한두 접씩의 김장거리들을 맨손으로 버무린 탓에 엄마들은 한밤 내내 홧홧거리는 두 손을 비비며 잠을 못 이루곤 했다.
그렇게 담근 김치는 김칫국, 김치찌개,김치전 등으로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밥상에 올랐다. 특히 먹다 남은 찬밥덩이에 김치 쑹쑹 썰어넣고 밀수제비 떠넣은 얼큰한 밥국의 그 맛이란…. 한데, 요즘은 갖가지 화려한(?) 양념의 김치라도 예전의 그 맛은 아니다. 소금과 고춧가루'마늘만으로도 코를 쨍하게 하던, 칼칼한 그 맛은 이제 다시 맛보기 힘든 걸까.
처가나라를 처음 찾아온 할리우드 인기 스타 니컬러스 케이지는 김치를 '영혼의 맛'이라고 극찬했다. "냄새는 시각이나 소리보다 더 확실하게 심금을 울린다"고 했던 키플링의 말마따나 해마다 김장철이면 멸치젓 냄새가 코를 찌르던 그 옛날의 김장 날 기억들이 새록거려진다.
전경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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