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속 오늘-조광조 사망

1519년 12월 20일 조광조(趙光祖)가 유배지 능주에서 사사(賜死)했다. 조선 전기 대표적인 개혁파였던 조광조는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훈구정치를 극복하려는 일련의 정책들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아버지가 연산군 때 좌의정을 지냈다는 이유로 반정(反正) 후 폐위된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해 반정공신들의 자의적인 조치를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도교 신앙의 제사를 집행하는 관서로서 성리학적 의례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로 몰아 혁파한 것도 근원은 훈구파 체제를 허물기 위해서였다. 1519년에는 중종반정 공신들이 너무 많음을 비판, 결국 105명의 공신 중 2등 공신 이하 76명에 이르는 인원의 훈작(勳爵)을 삭제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공격받았고, 결국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의 지지를 업은 훈구파에 의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능주에 유배됐다가 사약을 받고 짧은 삶을 마감했다.

유학의 이상인 왕도(王道)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려 했던 조광조는 학문과 경륜이 완숙되기 전 정치에 뛰어들어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다 실패했다. 이 점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하나의 교훈이 되고 있다.

▲1942년 노기남 신부, 한국 최초로 주교 서품 ▲1961년 유엔, 대기권 평화적 이용안 가결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정계은퇴 선언.

조문호기자 news119@imaei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