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빠가 읽어주는 전래동화-엽전골 짚신서방

오늘은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할까. 옛날에 간날에 한 부자 양반이 살았는데, 이 양반이 글을 몰랐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이 말이지. 그런데 겉은 번드레하니까 누가 그걸 알아? 큰 부잣집에 살면서 말쑥하게 차려입고 잔뜩 점잔을 빼고 다니니까 다들 아주 유식한 줄 알지.

그런데 이 양반이 돈이 많으니까 돈놀이를 했어. 누구든지 궁한 사람이 찾아오면 돈을 빌려주고, 얼마 지난 뒤에 길미까지 톡톡히 쳐서 돌려받는 것 말이야. 그런 돈놀이를 하는데, 그런 일을 하자면 글을 알아야지, 안 그래? 돈을 빌려 줄 때마다 일일이 치부책에 적어 놔야지, 그걸 다 머릿속에 욀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런데 이 양반은 글을 모르니까 치부책이 있어도 못 적지. 그래서 궁리 끝에 아주 좋은 수를 하나 냈어.

어떤 수를 냈는고 하니, 글 대신에 그림을 그려 넣은 거야. 가령 감나무골 박서방이 돈 닷 냥을 빌려 갔다 치면, 감을 하나 그려 놓고 박을 하나 그려 놓고, 그 옆에 돈을 다섯 개 그려 놓는 거지. 그러면 나중에 그 그림만 딱 봐도 다 알거든. 감을 그려 놨으니까 감나무골이요, 박을 그려 놨으니까 박서방이요, 돈 다섯 개를 그려 놨으니까 돈 닷 냥 빌려 갔다는 걸 알지. 그래 가지고 때가 되면 영락없이 돈을 받아내는 거야.

"에헴, 오늘은 감나무골 박서방한테 돈 닷 냥 꾸어 준 것 받을 날이구나. 얘들아, 어서 가서 길미까지 일곱 냥 닷 푼 받아 오너라."

치부책을 보고서 이렇게 딱딱 짚어내니까 심부름하는 하인들도 제 주인이 아주 글을 잘하는 줄 알지. 돈 빌려 가는 사람도 매한가지야. 돈을 빌려 주고 나서 치부책을 펴 놓고 붓으로 뭘 열심히 끼적거리니까 그게 다 글자 쓰는 줄 알지, 설마 그림 그리는 줄 누가 알겠어?

그러다가 한번은 이 영감이 배나무골 이서방한테 돈을 꾸어 줬어. 그리고 치부책에 그림을 그려 넣는데, 먼저 배나무골이니까 배를 하나 그리고, 이서방이라고 이 한 마리를 그렸거든. 그런데 그날따라 바빠서 대충 그리느라고, 배를 그린다는 게 그냥 동글동글한 동그라미를 하나 그리고, 이를 그린다는 게 그냥 길쭉한 동그라미를 하나 그려 놨어.

그래 놓고 나서 세월이 흘러 돈 받을 때가 됐지. 이 양반이 치부책을 펴 놓고 딱 보니까 동글동글한 동그라미 옆에 길쭉한 동그라미가 하나 있거든. 이게 뭘 그린 걸까, 궁리하다가 무릎을 탁 치고 하는 말이,

"옳거니. 동글동글한 건 틀림없는 엽전이요, 길쭉한 건 보나마나 짚신이렷다."

하고서, 하인들을 불러다가 점잔을 빼며 심부름을 시켰네.

"얘들아, 얼른 엽전골에 가서 짚신서방한테 돈 받아 오너라."

하인들이 들어 보니 참 어이가 없어서,

"우리 고을에 엽전골이라는 데는 없고, 짚신서방이라는 사람도 없는뎁쇼."

했더니, 이 양반이 다시 치부책을 펴 놓고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하는 말이,

"이키, 내가 배를 그린다는 게 꼭지를 빠뜨리고, 이를 그린다는 게 발을 빠뜨렸구나."

하더라나. 하하하.

서정오(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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